▲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이글은 연재의 흐름에서 보면 궤도 이탈이다. 최근 국회에서의 사회적 대화를 둘러싸고 이러저러한 논란이 진행 중인 탓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회에서 사회적 대화체를 구축하기 위해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국노총, 경총, 민주노총 등을 잇달아 찾아가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전환의 시대를 맞아 어느 때보다 사회경제 주체들의 대화와 조율이 절실하지만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모델은 20년 넘게 겉돌고 있다. 우 의장은 5선의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원내대표 시절에는 사회적 대타협기구로서 사회연대위원회를 제안하기도 했다(2018.1). 을지로위원회를 이끌면서 ‘택배종사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대화기구’를 꾸려 합의를 끌어냈으며(2021.1)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는 정부가 건설노조 탄압을 중단하고 건설산업 문제를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고 촉구하기도 했다(2023.5). 이런 점에 비춰볼 때 국회 내에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자는 우 의장의 제안은 진심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회에 사회적 대화기구를 설치하자는 그의 제안도 이대로 수용하면 될까.

대화와 입법 연계 강화와 정부 주도성 배제 가능

사회적 대화는 뭐, 거창한 거라기보다는 주요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정책협의를 말한다. 일정 기간 지속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숙의형 거버넌스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정책협의는 입법사항도 포함한다. 사회적 대화를 경사노위가 독점할 이유는 없다. 국회 차원에서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하자는 제안은 사회적 대화의 지평을 넓히고 사회적 대화의 다양성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원래부터 국회는 사회적 대화와 친화성이 강한 조직이다. 국회는 입법과 예산을 다루는 곳이고, 그 과정에서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가령 노동입법만 하더라도 간담회나 공청회 등을 통해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부의 방침을 검토해 결정하는 것이 상례다. 국회 차원의 사회적 대화가 갖는 장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사회적 대화가 입법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사노위에 불참하고 있는 민주노총이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장점이다(민주노총은 아직 참여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국회의 자원, 가령 국회미래연구원을 대화지원은 물론 상시적인 실무대화의 장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국회에서 사회적 대화를 추진할 때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다수 정당을 기반으로 삼는 국회가 사회적 대화를 주도한다는 점일 것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것과 달리 사회적 대화가 정부나 특정 정당의 들러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게 그것이다. 실제로 경사노위는 대통령이 위원장과 상임위원은 물론 공익위원과 계층위원을 위촉하고, 예산과 인력도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때문에 출발부터 정부 편향성을 띨 우려가 크다. 국회 차원의 사회적 대화는 다수 정당 사이에서 반대의 제도화와 조율을 통해 운영된다는 점에서 공정성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고 할 수 있다.

정쟁 휘말리거나 합의형 민주주의 실종될 수도

국회에서 사회적 대화기구를 설치했다고 해서 그것이 흥부네가 애를 낳듯 조롯이 사회적 합의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누구나 알다시피 ‘사회적 대화를 하기 어려운 나라’다. 사회적 대화를 위한 제도적인 조건(강력한 친노동정당의 존재 또는 노사단체의 중앙집권적인 조직체계)도 모자란 데다 주체들의 전략적 선택(사회적 대화에 대한 의지와 역량)도 제한적인 탓이다. 이것이 사실상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가 파행을 거듭해온 핵심적인 이유다. 국회에서 사회적 대화를 한다고 해서 이런 약점들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국회 차원의 정쟁이 사회적 대화에 바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합의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다당제 연합정치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작금의 국회에서 타협과 조율의 정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양극화된 정치지형에서 사회적 대화는 여야 정쟁의 자장(磁場)에 갇혀 언제든지 멈춰 설 수 있다. 정쟁과 사회적 대화 사이에 차단벽이라도 세우면 모를까, 사회적 대화기구는 정쟁에 휘말려 걸핏하면 흉가처럼 남을 것이다(사회적 대화의 퇴조·안정을 정당 경쟁의 양식으로 설명하는 연구도 있다). 얼마 전 국회에서 노동포럼이 출범했다. 야 4당(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사회민주당)만 참여했을 뿐 국민의힘은 참여하지 않았다. 사실 국회에서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려면 민주노총의 참여도 중요하지만 여당인 국민의힘의 참여가 더욱 중요하다. 정치의 복원이 사회적 대화의 복원보다 시급할 뿐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대화의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의 참여 여부는 남아있는 질문이다. 국회의 운영과 사회적 대화는 모두 민주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민주주의의 성격은 다르다. 국회는 입법기구로서 의결절차를 필요로 하지만 사회적 대화는 협의를 주로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의결절차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국회가 다수결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삼는다면 사회적 대화는 만장일치(혹은 동의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운영원리로 삼는다. 이게 왜 문제가 될까. 참여 주체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쟁점법안이라도 국회는 입법할 수 있다. 실제로 노동입법은 사회적 대화에서도 가장 합의가 어렵기로 소문나 있다. 이해당사자 사이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가 입법을 강행할 경우 반대단체는 당연히 국회를 비난하고 예의 대화 무용론을 제기할 수 있다.

경사노위 대체보다 사회적 대화 관행 축적해야

국회 차원의 사회적 대화체가 경사노위를 대체하는 기구일까, 아니면 보완하는 기구일까도 관심 사항이다. 경사노위를 대체하는 기구의 설립은 바람직스럽지 않아 보인다. 경사노위의 폐지를 둘러싼 정치적 과정은 차치하더라도 경사노위가 갖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정부 정책에 관한 대화나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에선 경사노위가 유리할 수도 있다(물론 경사노위가 제대로 가동된다는 걸 전제로 한다). 우리나라의 제도적 사회적 대화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간의 사회적 대화는 대통령 의존적이고 대통령 후원의 사회적 대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회의장에 의존하는 사회적 대화는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국회의장의 병풍 안에서 노사와 같은 이해당사자의 중심성이 관철될 수 있을까. 더욱이 국회의장의 임기는 2년인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에 대한 국회의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할 방법은 있을까. 분점정부, 즉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국회에서의 사회적 대화는 정부의 정책을 견제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바로 지금이 그렇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여당이 다수당이 되면 어떻게 될까. 입법권을 매개로 한 정부·여당의 입김은 경사노위의 경우보다 더 강해지지 않을까. 국회차원의 사회적 대화는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사회적 대화는 전환의 과정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전환의 과정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건널목이다. 하지만 당장 경사노위를 대체하는 기구를 설립하는 건 과욕이자 과속일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사실 독립적인 기구를 설립하는 것 자체가 시기상조로 보인다. 지금도 국회에서는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혹은 특위의 형태를 빌어 사회적 대화방식을 활용할 수 있다. 연금특위에서 사회적 대화방식을 활용하기도 했으며 앞으로 기후특위가 구성되면 그 산하에서 기후 관련 사회적 대화를 운영할 수 있다. 국회노동포럼도 여당의 참가를 전제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사회적 대화의 경험이 어느 정도 축적된 연후에 이를 담아낼 사회적 대화기구의 설립을 검토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경사노위의 폐지도 마찬가지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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