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후위기에 부실 대응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인 ‘환경권’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해외 기후소송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 결정은 아시아 최초 판단이다.
헌법재판소는 29일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 8조1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헌법 불합치 결정했다. 해당 조항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8년 배출량 대비 40% 감축한다는 중장기 감축 목표를 규정했다.
“2030년 이후 목표 없다”
헌재는 정부가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하면서도 2030년 이후 감축 목표를 정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았다. 헌재는 “2031년부터 2049년까지 감축 목표에 관해 정량적 수준을 어떤 형태로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소보호금지원칙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2050년 탄소중립의 목표 시점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감축을 실효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없으므로, 미래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하는 방식으로 감축목표를 규율했다”며 “기후위기라는 위험에 상응하는 보호조치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성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봤다.
입법자가 구체적 입법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헌재는 중장기적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감축경로를 계획할 땐 매우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점, 미래세대는 민주적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제약된 점을 지적하며 법률유보원칙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탄소중립기본법 8조1항이 두 원칙에 반해 기본권 보호의무를 위반했으므로 환경권을 침해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해당 조항 전부에 대한 효력 상실은 그나마 존재하는 중간목표마저 사라져 오히려 온실가스 감축 관련 제도적 장치가 후퇴하는 더욱 위헌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위헌 의견을 낸 김기영·문형배·이미선·정정미·정형식 재판관은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량 목표를 상향한 것처럼 눈속임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는데, 감축 기준연도인 2018년엔 ‘총배출량’, 목표연도인 2030년엔 ‘순배출량’을 적용했다. 흡수량을 빼지 않은 총배출량을 기준으로 통일하면 실제 감축률은 30%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재판관들은 “정부가 채택한 ‘기준연도 총배출량-목표연도 순배출량’의 배출량 목표치 산정 방식은, 탄소중립기본법 8조1항에서 입법자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정량화한 체계를 자의적으로 변경해 기후위기를 완화하는 보호조치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관들은 위헌을 확인하되 정부가 결정 취지에 부합하도록 계획을 시행할 때까지 효력을 유지하는 의미에서 취소결정은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다. 이종석·이은애·이영진·김형두 재판관은 기각 의견을 냈다.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해당 조항은 2026년 2월28일까지만 효력이 인정된다. 정부와 국회는 결정 취지를 반영해 보다 강화된 기후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끝이 아닌 시작”
이번 소송은 2020년 3월 청소년 19명이 ‘기후소송’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불충분해 미래세대가 과중한 온실가스 감축 부담을 짊어질 수 있어 기본권 보호 의무를 어겼다는 주장이다. 이후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시민단체와 어린이 62명 등이 추가로 소송을 제기했다.
헌재 결정 직후 어린이 청구인인 한재아(12)씨는 “우리는 기후위기 영향을 받는 미래세대라고 불리지만 여기 존재하고 살고 있다”며 “이번 결정으로 우리들이 얼마나 기후위기를 걱정하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기후위기는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겪는 현실”이라며 “더는 미룰 시간이 없다”고 강조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나온 이번 결정은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사라 미드 기후소송네트워크 공동디렉터는 “네덜란드·독일·벨기에·유럽인권재판소를 잇는 한국 헌재의 이번 결정은 아시아 최초로 중요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며 전 세계 계류 중인 수십 건의 유사 사건들에도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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