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자연과학적 지식이나 수치화된 기록에 겁을 먹거나 맹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숫자는 사람들의 삶, 특히 노동자와 그들이 하는 일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필자는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다투는 소송 역시 이런 명제가 유효하다고 믿고 있다.
일하다가 다치거나, 병에 걸리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은 경우 질병이나 부상, 사망이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질병이나 부상, 사망과 재해를 입은 노동자의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돼야 한다.
그것도 무려 자연과학적, 의학적 인과관계를 인정받기 위해 소송 과정에서 해당 분야 전문의의 감정이라는 절차를 거치기도 한다. 감정의는 자신의 의학적 지식과 임상 경험 등을 바탕으로 감정 의견을 제시하는데 의학적 지식에 근거하다 보니 자연과학·의학적 판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돌연사의 경우 과로와 업무상 스트레스의 존재를 인정받아야 하는데, 구체적인 기준은 고용노동부에서 마련한 고시에 규정돼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만성적인 과로로 인정받기 위해는 재해자가 쓰러지기 직전 12주 동안 1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해야 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라도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이 다수 존재한다면 인과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돌연사한 재해자의 12주 동안의 주당 노동시간이 52시간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해당 사건을 수행해야 하는 필자와 같은 담당 변호사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도 법원은 자연과학·의학적 감정 의견이나 수치화된 노동시간을 합리적인 근거 없이 무시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으나, 반드시 재해와 업무 사이에 의학적 인과관계가 인정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재해자의 업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정들을 고려할 때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산재로 인정한다.
2024년 5월23일 서울행정법원 7부(부장판사 이주영)는 식품 가공공장에서 하청업체 소속 생산직으로 근무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한 재해자의 사망에 업무와 연관성이 인정된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 줬다. 해당 사건에서 재판부는 원고에게 불리한, 수치화된 증거가 있었으나 규범적으로 판단할 때 재해자의 과로나 업무상 스트레스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유족인 원고에게 불리한 첫 번째 수치화된 증거는 노동시간이었다. 뇌출혈이나 심근경색과 같은 돌연사의 경우 노동시간과 업무상 스트레스 인정 여부가 중요한데, 노동부가 정한 고시에 의하면 만성과로는 쓰러지기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노동시간이 52시간 이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회사에 기록된 재해자의 출퇴근 기록으로 파악한 노동시간은 1주당 46시간에 불과했고, 회사에서 셔틀버스로 통근까지 시켜주니 만성과로를 주장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회사의 출퇴근 기록과 달랐다. 재해자가 셔틀버스를 이용해 통근했다는 점에 착안해 재해자 주거지에서 회사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 운행시각을 확보해 검토했더니 회사 기록에 출근 시각으로 기록된 오전 8시30분보다 40분 정도 이른 시간에 셔틀버스를 이용해 출근했다. 출근 후 작업복으로 환복하고 아침 조회와 체조를 한 후 오전 8시30분에 작업에 투입됐다. 그리고 재해자는 업무가 끝난 후에도 퇴근용 셔틀버스를 이용하기 위해 대기하는 시간이 약 20~30분 정도 있었다. 그 시간 재해자는 퇴근 준비를 하거나 대부분은 다른 직원들의 잔업을 도왔다.
법원은 업무 시간은 물론이고, 업무를 위한 준비 시간 즉 △작업복으로 환복하는 시간 △아침조회 시간 △체조 시간은 물론 △작업 완료 후 잔업처리 시간 △업무를 위한 대기시간 등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실제 업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노동시간으로 판단하고 있다.
재해자가 셔틀버스를 이용해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실제 업무 수행 시간은 물론이고 업무 수행을 위한 준비 및 정리 시간까지 모두 다 더해 계산한 노동시간은 50시간이 넘지만 52시간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법원은 노동부 고시 기준인 52시간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업무상 스트레스가 다수 인정되면 인과관계를 인정한다. 해당 재판부 역시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유족에게 불리한 두 번째 수치화된 증거는 작업환경측정 결과였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노동자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작업환경 중 존재하는 유해인자에 노동자가 얼마나 노출되는지를 측정·평가하도록 하고, 문제점을 개선하도록 한다.
재해자가 일했던 작업장은 레토르트 제품 등 포장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재해자는 고열로 처리된 레토르트 제품이 물을 따라 흘러가며 냉각되는 과정을 담당했다. 뇌출혈에 영향을 미칠 유해요인으로는 온·습도가 꼽혔다. 고온다습한 환경에 지속 노출되면 뇌출혈의 발병 위험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작업환경측정 결과표에 기재된 온도와 습도 수치는 기준을 넘지 않았다.
필자는 재해자가 작업장에서 쓰러졌을 당시의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다. 이를 시청하면서 작업장이 참 넓고 쾌적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라인 옆에서 멀쩡히 일하던 재해자가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은 작업장이 참 넓다는 점이었다. 작업환경측정 결과표에 표시된 온도와 습도가 뜨겁게 가열된 레토르트 제품이 지나가는 생산라인의 온도와 습도는 수치로 표시된 것 이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업환경측정을 한 시기는 초여름인 6월이고, 재해자가 쓰러진 시기는 한여름인 8월이니까 이 기간 사이 온·습도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온도와 습도로 인한 업무상 스트레스를 인정했다. 물론 재해자가 일했던 생산라인의 온도와 습도를 증명할 수 있는 수치화된 증거는 없었다. 재판부는 수치보다는 실제 업무가 행해지는 현장의 현실을 보았다.
유족에 불리한 세 번째 증거는 재해자의 의무기록이다. 재해자는 사망 전부터 고혈압과 이상지질혈증을 앓았다. 고혈압과 이상지질혈증은 뇌출혈 발병의 대표적 위험인자다. 자칫하면 재해자의 뇌출혈 발병이 순전히 재해자의 개인적인 요인, 고혈압과 이상지질혈증의 탓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법원은 평소에 정상적인 근무가 가능한 기초 질병이나 기존 질병이 직무의 과중 등이 원인이 돼 자연적인 진행속도 이상으로 급격하게 악화된 경우도 인과관계를 인정한다. 해당 재판부 역시 이를 근거로 재해자의 과로와 업무상 스트레스가 재해자의 위험요인을 정상적인 진행 속도보다 빠르게 악화시켜 뇌출혈이 일어난 것이라고 봤다.
필자의 소송 수행 경험에 비춰볼 때,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한 결정적인 이유는 재해자의 고혈압과 이상지질혈증이 잘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당뇨 등이 있어도 잘 관리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돌연사가 발생해도 산재로 인정받기 어렵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당뇨 진단을 받았다면 방치하지 말고 병원에서 반드시 관리받기를 조언드린다.
이번 사건을 수행하면서 느낀 점은 객관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수치는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규범적 인과관계라는 표현이 있다. 규범이라는 단어에서 위압감이 느껴지지만, 그나마 산재 인정 여부를 다투는 현장을 사람 냄새가 나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재해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