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이쯤 되면 어느 책의 제목처럼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자연스럽다. 후계자로 보이는 여당 대표한테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으면서 21번의 거부권 행사부터 채상병 특검, 대일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야권 전체에 대한 도발을 이어 가고 있는 걸 보면 검사 출신이라 자신이 법적인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그만큼이나 확신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후보 시절의 말을 빌리자면….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특히 한일관계가 그렇다. 대일관계 개선이 최대 업적이라 생각해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한일관계는 애당초 ‘임기 5년’의 대통령이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민족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를 지도자의 ‘고독한’ 결단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결과를 지금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영구집권을 꾀한 권위주의적 지도자조차 해결 못 한 문제를 고작 임기 5년의 대통령이 국민의 절반을 배제한 채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의 운명’에 대한 걱정이 들 수밖에.

한일관계의 핵심에는 ‘식민지배’가 놓여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한국과, 법적인 책임이 없다며 도의적인 책임만 내세우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지지 않으려 하는 일본 간의 대립은 식민지배에 대한 상이한 이해에서 비롯됐다. 1945년 8월15일을 ‘해방’으로 기억하는 한국과 ‘제국으로부터의 분리’로 여기는 일본의 인식 차이를 어떻게 좁힐 것인가? 1951년 도쿄의 연합국 최고사령부 회의실에서 개최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예비회담장에서 있었던 한국측 대표 양유찬 주미대사와 일본측 대표 치바 히로시 교체수석대표 간의 다음의 대화는 이 문제의 지난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지난날 당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배상 같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겠다. (…) 이제 우리 화해하자.”(양유찬)

“화해할 게 뭐 있습니까?”(치바 히로시)

냉전이라는 국제적 조건은 이러한 인식의 격차를 국익이라는 ‘현실’을 내세우며 강제적으로 봉합하게 만들었다. 비록 ‘제국 일본’이 ‘민주화된 일본’으로 바뀌었지만, 그들이 주변 민족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제국’이 폭력을 앞세워 식민화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다면 ‘민주화된’ 일본은 권위주의적 정부들과 결탁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법적인 논리를 앞세워 식민지배 문제 자체를 ‘완전히’ 해소하는 식으로 제국 일본을 긍정하고자 했다. 한국의 독재정권과 일본의 민주정부 간 ‘결탁’은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한국의 민주화를 일본의 민주주의와 연결시키면서 많이 형해화됐지만 제도적으로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바로 그 틈을 파고 든다. ‘민주화된’ 한국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일본의 책임은 도외시한 채 식민지배 및 그것을 정당화한 독재정권의 ‘유산’을 그대로 수용하라고, 그래야 ‘근대적’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뉴라이트가 악당이라, 매국노라, 친일파라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독재정권이었을지라도 과거의 한국 정부가 일본과 맺은 관계는 지금의 우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잘라내 버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 문제는 민주화된 한일이 어떤 인식에 기초해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논할 때 해결될 수 있다. 타인을 예속시키는 식민지배에 대한 무반성은 양국 모두의 인권·민주주의 등을 후퇴시킨다. 예컨대 위안부가 ‘매춘’을 했다고 한 반일종족주의자 이우연은 N번방 피해자들을 비난한 적이 있다. 매춘부든 아니든 국가가 여성의 성을 착취해서는 안된다는 인권의식의 부재가 현재로 이어지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는 인권도, 민주주의도 지킬 수 없다는 인식을 한일 양측에서 이끌어 낼 때 비로소 영구적인 해결이 가능해진다. 대통령이 할 일은 그 인식의 통일을 위한 단초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정권 바뀌면 엎어질 ‘치적’을 쌓는 게 아니다. 지금이라도 그나마 남은 대화의 여지를 없애는 일을 멈추기를 대통령께 간청한다.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fpdlaks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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