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지금까지 열여섯 차례에 걸쳐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운영원칙을 살펴봤다. 사회적 대화의 ‘신 3원칙’이랄까,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운영을 특징짓는 세 가지 변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왔다.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한 점, 노사중심의 운영원칙을 확인한 점, 그리고 계층위원제를 도입한 점 등이 그것이다.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합의한 개편안은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인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8년 5월10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법 개정안’으로 대표 발의했다. 법안 발의에는 국회 환노위 소속 의원 전원을 포함해 여야의원 67명이 참여했다. 특정 법안 발의에 해당 상임위 여야의원이 모두 동참한 것은 20대 국회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는 노사정 합의에 이어 여야의 합의를 바탕으로 출범한 셈이었다. 홍영표 의원의 발의안은 ‘수정 없이’ 국회를 통과했다. 노사정 합의(2018.4.23.)에서 국회 통과(2018.5.28)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 남짓. 대통령이 이를 공포한 것은 2018년 6월12일이었다.

사회적 대화 기구 없어도 대화는 가능하지만

사회적 대화기구를 잘 설계한다고 사회적 대화가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 지금까지 사회적 대화가 파행을 거듭한 원인을 사회적 대화기구 구성이나 운영에서 찾는다면 이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 될 수 있다. 그릇은 물을 담을 뿐 물을 만들지 않듯이 경사노위는 공론장일 뿐 대화의 내용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대화의 운영원칙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적 대화의 운영원칙은 참여자 구성과 의제 설정방식, 회의 진행 및 의결 절차, 그리고 후속 조치까지 포괄한다. 그것이 사회적 대화에 대한 참여자의 의지와 역량과 같은 주체적 조건을 결정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사회 환경이나 노사관계의 현황과 같은 환경적 조건을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운영원칙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정책협의 틀과 운영을 규정함으로써 대화의 원만한 진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적 합의에 해당한다.

길거리 농구에서도 최소한의 규칙은 있고 학급 반장 선거에도 지켜야 할 기본은 있다. 회의 규칙이 회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준수되지 않으면 회의의 진행이 흐트러지거나 그 결과에 참석자가 승복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더욱이 사회적 대화는 일회성 협의장치가 아니라 숙의적 거버넌스(deliberative governance)로 반복되는 게임이다. 당사자들이 운영규칙을 사전에 합의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사회적 대화기구가 없어도 사회적 대화는 가능하다. 제도적인 기구가 사회적 대화를 독점할 일도 없다. 하지만 제도적인 사회적 대화기구가 갖는 장점은 있다. 정부의 참가를 포함한 공론장의 구성은 물론 대화의 지속적인 운영 가능성을 확보하기가 용이하다. 합의가 이뤄질 경우 이행이라는 측면에서 정부의 책임을 소환할 수도 있다.

관철되지 않은 제안의 의미도 다시 따져 봐야

사회적 대화기구 설계 과정에서 양대 노총이나 사용자단체 제안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의미가 없다거나 의제에서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가령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기구를 협의기구로 자리매김하자고 제안했다. 외형적으로 관철됐지만 이를 내용적으로 완성하는 의결조항 폐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협의기구인데 의결구조를 가질 필요가 있는가”라는 건 아직도 남아있는 질문이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자리매김하면서 제안했던 이행점검 조항 삭제는 관철됐다. 하지만 이번엔 거꾸로 “이행점검에 관한 사항을 협의 대상에서 삭제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도 남아있는 질문이다. 협의가 합의를 배제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합의는 이행을 전제로 이뤄지는 까닭이다.

의제별·업종별 위원회에 독립적인 의제 설정권과 의결권을 부여하자는 민주노총의 제안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의제별·업종별 위원회에서는 관련 이해당사자가 모두 참여한다. 그렇다면 의제별·업종별 위원회에서 합의한 사항을 굳이 본위원회에서 재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본위원회 개최가 늦어지면서 합의사항의 이행을 늦추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하위 위원회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본위원회에서 합의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위 위원회에 의결권을 부여하는 사례는 독립적인 헌법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상임위원회와 소위원회를 두어 그 업무의 일부를 수행하게 한다. “상임위원회와 소위원회의 회의는 구성원 3명 이상의 출석과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규정해 사실상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다. 상임위원회나 소위원회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논의는 종결된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11명으로 구성되는 (전체) 위원회에 상정한다.

우리는 돌을 더듬으면서 강을 건넌다

논의 과정에서 이견을 보인 지점이나 운영과정에서 드러났던 적용의 문제는 언젠가는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의결구조 삭제 혹은 의결기구와 협의기구의 분리, 의제별·업종별 위원회의 상대적인 독립성, 계층위원제의 전면적인 재설계 등이 대표적이다. 합의사항이 제대로 이행됐는지도 검토할 사항일 것이다.

본위원회에서 공익위원을 배제하자는 민주노총의 제안이나 계층위원제 도입에 대한 사용자 단체의 반대도 관철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익위원의 필요성이나 계층위원제의 적절성을 재논의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회적 대화기구를 독립적인 행정위원회로 설정하거나 헌법으로 설치된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사회적 대화기구로 재편하자는 한국노총의 제안 역시 현안 과제로 남아있다.

합의된 원칙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인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적 대화를 진행하면서 협의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는 점이나 노사 중심성의 원칙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계층위원제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의 확대’라는 테스트베드(testbed)를 만나면서 설계의 허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로 출범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그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사회적 대화의 구성이나 운영원칙은 그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있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논의라도 출발하기 전에는 길을 알 수 없는 법이다. 가면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돌을 더듬으면서 강을 건너고 있다.” 덩 샤오핑의 말이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운영원칙은 주체들이 합의를 통해 마련한 것은 사실이고 이러한 점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앞에서 열거한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구성이나 원칙이 모두 법률조항으로 명문화된 것은 아니다. 가령 노사 중심성의 원칙은 법으로 규정되기보다 일종의 규범으로 합의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대화를 협의과정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라는 건 하버드대 교수이자 민주주의 연구자인 레비츠키(2018) 등이 <어떻게 민주주의가 무너지는가>에서 한 말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경사노위법이 국회 환노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한 그날, 5월22일 새벽 3시40분쯤, 민주노총은 긴급 보도자료를 내고 “이 시간부로 노사정대표자회의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어떤 회의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한국노총이 뒤를 따랐다. 국회가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관한 논의를 최저임금위원회로 넘기라는 양대 노총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 확대를 밀어붙인다는 이유였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합의를 보지 못해 국회로 넘어간 사안을 두고 왜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유탄을 맞아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노사정대표자회의는 활동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면서 멈춰 서고 말았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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