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은 상당히 치열한 업무다. 두서없이 쏟아지는 이야기에서 쟁점을 파악하는 건 미로찾기 같고,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는 과정은 스무고개 같고, 최대한 빨리 답을 내놓아야 하는 스피드 퀴즈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어찌 알고 내가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는 건지. 늘 어렵지만 어떤 말이 누군가에게는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에 노력한다.
올 초까지 1년 넘게 직장내 괴롭힘에 관한 이메일 상담을 이어갔던 사람이 있었다. 직장갑질119 상담을 통해 만났는데, 상급자로부터 업무배제와 차별, 부당한 지시를 당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증거도 충분히 수집했지만, 막상 신고할 용기가 없어 좌절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에 힘입어 회사에 괴롭힘을 신고했고, 그 결과 가해자는 징계를 받고, 그분은 타 부서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를 얻었다. 기껏 신고서를 다 쓰고도 전송 버튼을 누르기 힘들어 한참을 망설였다는 대목에서 마음이 짠했다. 괴롭힘이 인정되었다는 귀하고 기쁜 소식이 내 일인 것처럼 가슴이 벅차 마지막 답변을 쓰며 감동의 눈물을 조금 흘렸다.
얼마 후 나는 어느 회사의 직장내 괴롭힘 심의위원회 외부위원으로 참석했다. 신고인 1인이 피신고인 1인을 대상으로 5개 행위를 신고한 건이었는데, 다소 경직된 위계질서와 조직문화가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장기간 걸쳐 발생한 행위처럼 보였다. 신고된 행위의 발생 여부가 불확실하고, 업무상 필요성 있는 행위라는 이유 등으로 모두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결론이 났다. 심의 과정에서 한 외부위원은 놀라운 발언을 했다. 그는 한참 전에 일어난 행위를 이제 와 신고한 것은 피신고인을 해하려는 악의가 있어 괴롭힘이 아닐뿐더러 허위신고로 보이며, 허위신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신고인을 징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직장내 괴롭힘 판단에 관한 의견보다 신고인의 신고가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지를 이야기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은 당연하다 여기면서 타인의 고통에는 쉽고도 지나치게 냉정해진다. ‘허위신고’라는 말을 과연 쉽게 할 수 있을까. ‘인정되지 않으면 허위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논리 비약이다.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법이 그은 선을 빗겨나갔다는 뜻이지 주장 자체가 거짓이라는 의미가 될 수 없다. 법에서 정한 괴롭힘이 아닐지라도 이 사람이 직장생활에서 어떤 이유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고충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허위신고를 탓하기보다 그 고충을 진단하고 해소할 방안을 찾는 게 우선이다.
5년 전 일터에서 발생하는 갑질이 ‘직장내 괴롭힘’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직장인들은 비로소 존재하지만 설명할 수 없었던 자신의 부당함에 관한 언어를 획득했다. 호명되지 못해 떠돌던 부당함이 이제는 괴롭힘으로 불린다. 우리가 걱정할 것은 허위신고나 괴롭힘 신고 남용이 아니다. 여전히 괴롭힘을 신고하기 위해 주저, 망설임, 두려움, 압박감, 공포감을 뛰어넘어야 하는 이들 앞에서 허위신고를 걱정하는 건 배부른 일이다. 괴롭힘 피해자들은 고립감을 느끼고, 2차 피해에 노출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하는 것은 괴롭힘 신고 수만큼 많은 부당함이다. 그리고 괴롭힘을 해결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부당함을 괴롭힘이라 부르는 것 말고 달리 해소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허위신고를 들먹이기 전에 괴롭힘 피해 신고를 가로막는 게 무엇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나는 괴롭힘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기꺼이 만나며, 의심하기보다 공감하고 싶다. 차단하기보다 귀 기울이고 싶다. 단정 짓기보다 상상하고 싶다. 얼굴을 본 적도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지만 어려움을 마주하고, 나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나눠주고, 싸움을 결심한 이들을 향해 있는 힘껏 응원의 손뼉을 치고 싶다. 그럼에도, 괴롭힘 때문에 나를 찾는 사람이 아주 적거나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괴롭힘을 마주칠 때면 자주 그분이 궁금하다. 평안을 찾았을까. 그분은 마지막 메일에서 새로운 부서에서 다른 어려운 일이 생기면 또 이메일을 보내도 되느냐고 물었다. 상담이 필요하면 이메일을 보내달라고 썼지만, 솔직한 마음은 다르다. 이메일 보낼 일 없이 지냈으면 좋겠다. 당신이 다시 이메일을 보내지 않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