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놀고 싶다
아이와 외출하면 열에 아홉 듣는 말이 있다. “장난감 사 줘.” 요즘은 어디에 가도 온통 장난감이다. 마트, 편의점, 놀이공원, 공항, 여행지, 심지어 약국에도. 견물생심이라고 장난감이 보이면 평온했던 우리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장난감만 보면 반응하는 DNA가 우리 안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결국 아이를 달랜다는 명목으로 변신·합체 로봇이나 자동차 장난감을 집에 들여놓는 일이 많다.
어느 날, 거실이나 방에 잔뜩 늘어놓은 장난감 대열을 보며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고 TV에 지상파 방송만 나오던 시절, 장난감은 마치 영원 같은 지루한 일상을 달래 준 놀이 수단이었다는 것을. 그 장난감이 모두 어디로 갔을까. 장난감 없는 지금 나의 삶을 들여다 본다.
모빌슈트 건담과 지구용사 선가드
초등학생 시절,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조립식 로봇을 주로 가지고 놀았다. 천 원짜리 한두 장이면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SD 건담’ 같은 제품을 살 수 있었는데, 프라모델이라는 개념이 희박할 때라 모조 제품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격이 너무 저렴했고, 무엇보다 포장박스 겉에 인쇄된 사진과 실제 제품 모습이 다를 때가 많았다.
부모님은 몇만 원하는 비싼 장난감은 사주지 않았다. 그때 유행했던 ‘지구용사 선가드’나 ‘전설의 용자 다간’ ‘로봇수사대 K캅스’ 같은 변신·합체 로봇을 만지려면 친구 집에 가야 했다. 레고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집을 비울 때가 많아,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친구 집에 달려가 해 질 때까지 놀았다.
장난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로봇의 팔다리를 앞뒤 좌우 움직이며, 로봇을 자동차나 다른 형태로 변신시키는 게 전부였지만, 이 동작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얼마 안 되는 기억에 의지해 당시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나와 친구는 장난감으로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썼다.
즉석에서 내뱉는 말들이 놀이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우리 손에 들린 장난감은 우리 자아가 투영된 주인공들이었다. 한쪽은 선하고, 다른 쪽은 악해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죽어 없어져야 끝나는 매번 같은 패턴의 이 놀이는 유치하지만 진지했고, 잔인하지만 사랑스러웠다. 나는 가끔 아이가 장난감 로봇을 가지고 같이 놀자고 하면 뒷걸음질 칠 때가 있다.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지 못하겠고 전투 상황에서 너무 세게 얻어맞아 빈정 상할 때가 있어서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의 이해되지 않은 모습이 지극히 당연했다.
시공간을 초월한 대항해시대와 삼국지
1990년대 중반, 컴퓨터라는 새로운 놀이 수단이 등장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누나가 어느 날 집에 작은 모니터를 가져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PC통신 전용 단말기였다. 가정용 컴퓨터의 존재를 처음 인식한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컴퓨터로 PC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이 주신 용돈으로 오락실에 간 적 있다. 전자오락은 익숙했다. 그런데 PC 게임이라니. PC는 오락실과 수준이 달랐다. 페르시아 왕자나 대항의시대2, 코에이(현재 코에이 테크모)의 삼국지, 로켓맨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었는데, 이 게임이 지닌 이야기의 얼개가 얼마나 깊고 탄탄한지, 단순히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이용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게임을 구하는 방법도 어렵지 않았다. 동네 컴퓨터 대리점에서 몇천 원만 주면 살 수 있었다. 사장님이 클리어 파일을 펼치면 그 안에는 게임 타이틀과 설명이 나열돼 있는데, 원하는 게임을 선택하면 그 자리에서 CD를 구워 줬다. 또는 지금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로 친구 PC에 있는 게임을 그대로 복사해 오는 방법도 있다.
물론 불법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때는 그런 일이 버젓이 성행했다. 기술 발달로 놀이의 방식은 다양해졌지만, 그에 맞는 공통된 약속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들에게 게임은 단순 놀이다. 법과 윤리는 어른들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개념이고, 게임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아이들에게 법과 윤리보다 중요한 건 재미니까.
친구 집에서 가상 세계로, 게임 공간의 변화
게임은 그렇게 우리 삶에 안착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게임 장소는 우리 집 아니면 친구 집이었다. 한 사람의 컴퓨터를 가지고 서로 순번을 정해서 하거나, 잘하는 친구의 플레이를 뒤에서 구경하며 공략법을 익히는 식이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될 무렵, 지각변동이라고 부를 수 외부 환경의 변화가 두 번이나 발생했다. PC방과 인터넷의 등장이다.
초등학생 6학년 겨울방학, 동네에 PC방이 생겼다. 이름도 낯선 그곳을 아저씨들이 학교 앞에서 1시간 무료 이용권을 나눠 줘서 처음 갔는데, 형광등 불빛 아래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사무실에서 넓은 책상 위로 수십 대 컴퓨터가 줄지어 있는 모습이 지금도 생경하다.
PC방을 처음 경험해 본 나도 그렇지만 지금 PC방의 모습이 익숙한 이들에게도 낯선 풍경일 것이다. 지금은 어두운 조명 아래 최신식 컴퓨터와 기계식 키보드가 무지개빛 네온 조명으로 반짝이고, 고급 헤드셋과 게이밍 의자가 구비돼 있으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짜파게티나 불닭볶음면, 떡볶이, 덮밥, 콜라 같은 음식도 시켜 먹을 수 있다.
PC방은 사람들이 함께 게임하는 공간을 마련했다면, 인터넷은 이 공간을 무한으로 확장시켜 줬다. 친구들과 각자 자신의 방에서 함께 게임을 즐기고, 다른 대륙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도 실시간으로 연결해 줬다.
나의 놀이를 찾아서
기술은 놀이를 바꿨다. 장난감에서 모니터로, 친구집에서 PC방으로 놀이는 진화했다. 나는 이 변화가 대체가 아닌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놀이가 다채로워진 것이다. 물성을 바탕으로 노는 사람의 습성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장난감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고, 최근 유행하는 카봇이나 또봇 같은 변신·합체 로봇은 옛날 장난감과 비교하면 변신 구조가 고도화됐지만,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잘 다룬다. 게임의 혁명 시대를 거친 나 같은 80년대생들 중에도 여전히 프라모델이나 미니카, 레고를 찾는 ‘키덜트’들이 존재한다. 대형마트에 가도 아이용과 어른용을 구분해서 배치한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장난감만 가지고 놀던 아이들도 언제가 스마트폰이나 PC 게임에 몰두할 때가 찾아오겠지만, 그럼에도 가상공간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몸으로 즐기고 노는 걸 좋아하는 형태도 존재한다. 요즘 청소년들이 볼링장이나 당구장, 노래방을 찾고, 서울 강남이나 홍대 앞에는 PC방 대신 방탈출이나 보드게임 까페가 즐비한 이유다.
다만 어른이 된 이들에게 놀이는 결국 시간과 돈이다. 해야 할 일이 많고 사는 게 팍팍하다면 노는 건 언감생심이다. 업무능력이나 생산성을 수치화해서 사람의 가치에 등급을 부여하는 산업 구조야말로, 내 눈앞에서 장난감을 치우고 놀고 싶은 마음을 증발시킨 원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