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죽음이 넘쳐 앞선 죽음의 기억을 밀어낸다.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에서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과로사한 로켓배송 노동자, 전주페이퍼에서 홀로 기계를 점검하다 숨진 19세 노동자, 아리셀에서 일하다 리튬배터리 폭발로 숨진 23명의 노동자.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 다짐은 일상적인 죽음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무거움도 옅어질까 두렵다. 무기력을 강요하는 이런 현실에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죽음들을 기억하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계속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9년 전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한 노동자들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2015년과 2016년, 청년노동자 6명이 실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노동자들은 인천과 부천에 있는 삼성전자나 LG전자에 납품하는 스마트폰 부품을 생산하는 작은 공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이 소속된 업체는 자신이 일한 공장이 아니라, 누리잡이니 드림아웃소싱이니 하는 파견업체였다. 이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공장에 간 노동자들은 자신이 취급하는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안전교육도 없이 일하다 메탄올에 중독돼 시력을 잃었다.

이 일이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통탄했다. 비용을 아끼려고 에탄올 대신 위험한 메탄올을 사용한 회사도 지탄했고, 불법적인 직업소개업체가 판치고 근로감독도 안 되는 현실도 비판했다. 그리고 9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노동자들을 모아 공장으로 보내던 불법 인력업체들은 사라졌을까. 고용노동부는 제대로 근로감독을 하고 있을까. 작은사업장의 노동안전 체계는 갖춰졌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번 아리셀 참사가 보여줬다.

아리셀은 ‘에스코넷’의 자회사이다. 그리고 아리셀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반수 이상은 메이셀이라는 업체에서 파견된 노동자였다. 메이셀은 독립된 사무실도 없고 직업소개업으로 등록되지도 않고 서면계약서도 없이 노동자들을 파견했다. 도급으로 위장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제대로 위장하려는 성의조차 없었다. 아리셀만의 문제가 아니다. 파견업체인지, 직업소개소인지, 도급업체인지 알 수 없는 유령업체들이 노동자들을 모아 제조업 현장에 파견한다. 안전교육도, 안전보건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 채 노동자들은 위험하게 일한다. 9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다른 점이라면 2015년에는 피해자가 청년노동자들이었지만 아리셀 참사에서는 이주노동자가 피해자라는 점뿐이다.

정부는 이 참사의 구조적인 원인인 ‘제조업 인력파견’ 문제를 회피한다. 2016년 메탄올 실명 피해 사건에서도 노동부는 이 피해자들이 ‘인력파견’으로 일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아리셀 참사에서도 언론이 불법 인력파견 문제를 지적하자, 노동부는 ‘수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거나 ‘검수작업의 파견 문제는 정책적 사안’이라고 주장하는 등 불법파견을 회피하려고 애썼다. 근로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노동부의 책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조업에서의 파견은 불법이지만, 노동부는 중소제조업에서 인력 구하기가 어렵다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정도가 아니다. 노동부는 ‘파견 제한을 풀어 모든 간접고용을 합법화하자’는 경제단체들의 요구를 수용해서 제조업 인력파견을 합법화하려고 한다. 노동자의 임금을 중간착취하는 파견사업주와 노동자를 일시키는 사용사업주 그 누구도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구조, 노동자들이 안전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얻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며 일하는 구조에서는 아무리 화학물질 대책이나 폭발사고 대응방안을 마련해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이런 현실을 노동부는 외면한다.

2015년 메탄올 실명 참사 이후 공단의 고용구조는 더 왜곡되었다. 2024년 아리셀 참사를 겪으며 또 목소리를 낸들 바뀔까 의문이 든다. 그래도 또 말한다. 제조업에서의 불법적인 인력파견에 대해 특별근로감독을 해야 한다. 불법파견이 확인되는 즉시 직접고용 시정명령을 내려야 한다. 인력소개업소들을 단속하고, 직업연결을 위해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불법파견을 정당화하고 확산하는 파견법(파견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없애고 간접고용을 규제하고 직업안정법을 강화해야 한다. 이 목소리가 약하더라도 계속 말해야 한다. 죽음의 무게가 결코 가벼워지지 않도록.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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