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우리나라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제도적 조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나라다. ‘독점적이고 중앙집중적이며 비민주적인’ 노사의 정상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친노동적인 강력한 정당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노사가 사회적 대화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감이나 이를 뒷받침할 파트너십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전략적 선택 능력의 결여를 말한다. “환경적·구조적 조건의 제약을 받지만 환경 요인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대응하는 능력”.

여기가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흔히 노사 사이의 파트너십이 모자란다고 말하지만, 노사는 파트너십이 있어야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면서 파트너십을 만들어 간다. 등산 근육을 기르는 최상의 방법이 등산인 것과 마찬가지로 협의 근육은 협의를 통해 형성된다는 말이다.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주고받는 걸 최정규 경북대 교수(2011)는 “백번의 메시지보다 한 잔의 술이 더 낫다”고 말한다.

노사중심성의 원칙이 절반의 허구, 즉 절반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정부의 역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노사중심성이라고 해서 정부는 뒷방 늙은이처럼 물러앉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노사의 자율적 결정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능하게끔 판을 까는 일은 정부의 고유한 역할이다. 그럼 노사중심성의 원칙에서 정부의 고유한 역할은 뭘까.

정부, 사회적 대화의 촉진자이자 협약의 보증인

사회적 대화에서 정부의 역할로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대화를 지원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노사 사이의 힘의 균형을 달성하는 일이다. 특히 주요 사회·경제적 집단들을 정치적으로 대리할 수 있는 계급정당이 포진해 있지 않은 정치지형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정부의 역할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친노동 정당의 부재’를 대체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가 2013년에 지적했듯이 사회적 파트너들에게 규칙적이고 효과적인 협의를 위한 적절한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대화를 촉진할 책임이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제도적이고 법률적인 프레임워크를 제공하고 실질적인 대화의 플랫폼을 구성한다. 정부는 노사갈등 이슈에 권위주의적으로 결정하고 집행하기보다는 사회적 파트너들에게 협의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이나 스웨덴의 살츠요바덴 협약에서 보듯 노사가 합의하지 못하면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행할 수밖에 없다는 압박(?)을 동원하기도 한다.

사회적 대화에서 이해의 차이를 조정하면서 합의를 조율하는 일도 정부의 역할이다. 이른바 중신애비의 역할이다. 중신애비는 결혼을 지원할 뿐 결혼을 결정하는 당사자가 아니듯 정부는 지원할 뿐 간섭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회적 대화는 본위원회가 아니라 의제별·업종별 위원회에서 이뤄진다. 정부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당부처의 국장급이 참가하지만 사회적 대화기구의 임원(위원장 및 상임위원)과 공익위원은 참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 대화의 현장에서 조정을 담당할 수 있는 일차적인 주체는 정부다. 또한 정부는 양보하는 측에게 보상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합의를 유도하고 합의가 이뤄졌을 때는 이행의 책임자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정부는 사회적 대화의 촉진자(facilitator)이자 합의된 협약의 보증인(guarantor)이 된다(ILO, 2013). 정부를 사회적 대화의 핵심 설계사(a principal architect)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 힘의 균형 위해 약자 지원해야

노사관계는 권력관계인 이상 힘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단체교섭이 그렇듯이 사회적 대화 역시 힘의 관계가 작동하는 정치의 영역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기울어진 결과를 낳는다. 객관적이고 기계적인 중립은 결국 강자 앞에 약자를 방치하는 것일 뿐이다.

사회적 대화가 파트너십에 바탕을 둔다 하더라도 약자로서는 결과가 뻔한 협의에 참가할 이유는 없다. 지난 회에서 말했듯이 사회적 대화, 즉 협의는 양보를 통해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내가 양보했는데도 상대방이 배신한다면 이를 보복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양보도 이뤄진다. 힘이란 상대방의 배신을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최정규, 2011). 상대방의 배신을 보복할 힘이 없으면 대등한 교환은 성립되기 어렵다. 단체교섭이나 사회적 대화처럼 반복되는 게임에서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면 힘이 센 집단은 보복의 두려움이 적어지면서 협조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정부 역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당사자를 지원해 양자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

노사정위원회 시절을 거쳐오면서 정부는 사회적 대화를 주도했지만 사회적 대화의 바탕을 이루는 이해당사자 간 힘의 균형을 달성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주도하는 마당에 주체들 사이의 힘의 균형은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부는 사용자의 노무관리기구를 대신해 노동탄압에 앞장서기도 했다. 정부의 의지가 ’답정너‘ 방식으로 사회적 대화의 결과를 좌우하면서 노동조합은 탈퇴와 불참을 되풀이했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 들어 사회적 대화가 노사중심성의 원칙을 내세운 것은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그것이 정부 주도적 사회적 대화라는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였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대화를 성장과 경쟁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노사가 평평한 운동장에서 노동존중사회의 구축을 논의하는 공론장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회적 대화 자체가 힘의 균형을 달성하는 수단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면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의 인상, 노동시간의 단축을 연이어 추진하는가 하면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동존중 사회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노동친화적인 정책을 도입함으로써 노동존중 사회의 초석을 놓는 한편 사회적 대화기구에 대한 노동조합의 참가를 유도했던 셈이다. 물론 의도한 바대로 성과를 냈다기보다는 결과적으로 또 다른 갈등의 불을 지폈다는 아쉬움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촛불정부에 걸맞게 정부정책이 좀 더 과감했으면 하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ILO 기본협약 비준이나 전교조 합법화, 당시 수감 중이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석방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노동조합, 특히 민주노총과 정부 사이의 교감은 없었다. 교감이 형성되기도 전에 민주노총 집행부(최종진 직무대행 체제)는 사회적 대화를 부정했고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노사 간 힘의 균형이라고 할 때 힘이란 조직률이나 조직·교섭구조와 같은 정적(static)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 맥락이나 노동시장의 상황, 정부·여당의 정치적 성향과 정치권의 세력 분포, 언론과 시민단체, 그리고 여론의 동향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동적(dynamic)인 개념이다. 채택하는 의제에 따라서 힘 관계가 바뀌는 상대성을 띠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여기서 지적할 사항은 사회적 대화는 그 자체로 힘의 균형을 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사회적 대화는 다수가 쳐다보는 공론장에서 갈등을 사회화하는 주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사회적·경제적 약함은 오직 정치적 강함에 의해서만 보충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겐 정치적 길항력(countervailing power)을 갖추는 것 외에는 강자에 맞설 다른 방법이 없다. 정치적 수단을 동원해 균형을 맞춰야 한다.” 한림대에 있는 최태욱 교수(2014)의 지적이다. 사회적 대화라는 노동정치의 바깥에서 힘의 균형을 외칠 일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노사중심성의 원칙과 관련해 남아 있는 과제 중 하나는 사회적 대화기구의 독립성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사회적 대화기구는 정부 정책의 우회적 전달벨트가 되지 않을 만큼 독립적이었을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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