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앞의 글에서는 노사중심성의 원칙을 실현하는 바탕으로 세 가지를 지적했다. “사회적 대화에서 정부를 대신할 수 있는 노사의 의지와 역량은 있을까”, “노사중심성의 원칙이 사회적 대화에서 정부의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부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을까”가 그것이다. 대답은 어느 것도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먼저 노사가 중심이 돼 사회적 대화를 끌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유럽의 경우 노사가 사회협약을 체결하는 게 그리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웨덴의 살츠요바덴 협약(1938년)이나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1982년)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노사중심성의 원칙이 고전적으로 관철된 사회협약이다.

살츠요바덴 협약은 스웨덴에서 사민당-농민당 연립정부가 집권한 후 이뤄진 협약이다. 생산직 노조총연맹(LO)과 사용자단체(SAF)는 노사갈등을 국가의 개입 없이 노사 공동기구를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확인한다. 이를 위해 노조는 사업장 내에서 경영권을 존중하는 대신 사용자는 노조를 인정한다는 데 합의한다. 사용자로서는 정부의 친노동정책을 우려해 노조와 사회협약을 맺음으로써 정부 개입의 명분을 차단하려 했다면 노동조합 역시 노사의 자율적인 해결에 동의한 결과였다. 1938년에 맺어진 이 협약은 노사의 집단적 자율체제를 넘어 중앙집중적인 임금교섭과 연대임금제로 발전하는 기틀이 됐다.

한편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1982년)은 보수-자유주의 연립정부에서 이뤄진 협약으로 큰 틀에서 보면 임금인상의 자제와 노동시간의 단축 및 고용보장, 그리고 세금감면과 보조금 지급을 교환한 협약이었다. 이 협약은 정부의 임금동결 압박 속에서 노사 협의기구인 노동재단에서 이뤄졌다. 사용자가 정부의 임금동결 압박에 기대는 대신 노조와 협의에 나선 것은 노사 사이의 오랜 파트너십의 결과이기도 했다. 바세나르 협약에서 돋보이는 것은 노총(FNV) 의장인 빔콕(Wim Kok)이 산하조직의 동의가 불투명한 가운데 합의를 택하고 이를 관철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다.

살츠요바덴 협약과 바세나르 협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부가 노사 사이의 협의를 압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협의하라, 그러면 정부는 당신들을 믿고 개입하지 않겠다”라는 네덜란드 정부의 언급이 이를 잘 말해준다(Visser 등, 2011). 다른 하나는 노사 역시 단기적인 이해에 집착해 정부의 개입을 수용함으로써 노사가 주변화되기보다는 노사가 주체로 나서는 해결방식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노사가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파트너십을 갖고 협의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사회적 대화를 노사 사이의 집단적 자율체제 위에 구축할 수 있을까.

정부의존적 노사관계에서 노사중심성의 원칙은 가능한가

노사중심성이란 노사 자치의 다른 표현이다. 국가 주도의 사회적 대화와 달리 이는 노사가 실질적이고 자율적으로 의제의 설정이나 협의의 진행, 나아가 사회적 대화기구의 운영을 담당한다. 정부는 지원하되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간섭주의를 유지한다. 정부는 경제사회정책의 최종 책임자로서 의제를 제안할 수는 있겠지만 수용 여부는 어디까지나 노사의 몫이다. 노사중심성의 원칙을 실현하려면 먼저 사회적 대화에 대한 주체의 정치적인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는 사회적 대화에 대한 노사의 책임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고 이를 주도하겠다는 노동조합의 정치적 의지와 헌신(political will and commitment, ILO, 2013)은 제한적이다. 사회적 대화에 결합하려던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력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사회적 대화에 적극 참여한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를 전술적인 수단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사용자단체들이 노사 중심성의 원칙을 따른 책임성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노동존중사회의 구축을 국정과제로 내세운 상황에서 사용자단체에게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노조의 의지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건 2018년 5월, 국회에서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되면서 양대 노총이 당시 노사정대표자회의의 불참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건은 최저임금위원회에서 합의하지 못한 채 국회로 넘어간 사항이었다. 당시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노사정위원회(노사정대표자회의)로서는 남의 방망이로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노동계로서는 정부·여당 노동정책의 약한 고리가 사회적 대화라고 보고, 사회적 대화로부터의 철수를 항의의 지렛대로 선택한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외에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무력하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심지어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 철수를 선언했다가 한국노총이 최저임금위원회 철수를 선언하자 그제야 최저임금위원회 철수를 선언했다. 당시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은 국회 환노위가 합의를 존중한다는 조건 아래 노사가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다시 논의하자고 제안했지만 노조는 거부했다. 결국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는 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 노동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노동조합이 사회적 대화에서 철수하면 사회적 대화는 물론 해당 노동정책은 정부·여당의 영향권 내로 되돌아간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노사협의로 연결하는 것이 사회적 대화이지만 노사는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사회적 대화를 떠난다는 건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존중 사회를 위한 노정동맹 기회를 놓쳐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사회의 구축을 국정과제로 내걸었고 그 과제를 사회적 대화를 통해 실현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이런 점에서 노사 중심성의 원칙은 노동존중사회 구축에 대한 노사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노동존중사회의 구축에 사용자가 동의해 주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노조로서는 노정동맹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노동존중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노정동맹은 비록 그것이 암묵적일지라도 그간 지속되어 온 사용자와 정부 사이의 오랜 동맹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동존중사회를 구축하겠다는 정부의 선언을 노조가 감시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는 전략적인 노력은 없었다. 정부나 국회가 정책이나 입법방향을 밝히면 노사는 양자가 협의하는 대신 정부나 국회로 달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정부의존적인 노사관계는 오랜 관성이었다. 노사가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낯설었다. 노사는 사실상 노동정책의 결정 과정에서 주변화됐다.

정부를 향한 항의나 로비가 상대방과의 협의보다 더 효과적이고 설득력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하다. 정부가 바라는 대로 해결해 줄 거라는 신뢰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표현이나 항의의 전달은 결국 면피를 위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반노동적인 정부나 국회가 문제다.” 패배주의에 빠진 가운데 내부 노동정치에 몰두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결국 정부의존적 노사관계가 말하는 바는 노사 공히 상대방에 대한 불신, 나아가 부정을 뜻한다. 노사 사이의 협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파트너십이 없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이와 더불어 노사 사이의 협의가 이뤄지려면 협의 과정에서 양보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이 역시 기업별 노조체계가 중앙집중적인 위계의 부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제도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었다. 대안은 없었을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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