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세이션’ 이 단어 외에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기자회견 한 번으로 여론을 반전시킨 민희진의 ‘연출’에 많은 이들이 감탄했다. 냉소적인 이들은 대중과 여론의 가변성에 혀를 찼지만, 페미니즘과 좌파가 수십 년에 걸쳐 ‘유리천장’ ‘성별 간 임금격차’ 등의 용어로 설명해 왔던 것을 ‘개저씨 회사’로 정리하며 대중에게 납득시키는 민희진의 역량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기자회견은 주장의 내용과 의도가 괴리된다는 점에서 기묘하기도 했다. 민희진은 자신이 하이브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그녀가 설명한 정황들은 모두 하이브 탈출의 동기를 강화시키는 것들 뿐이었다. 또 역설적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뉴진스를 아끼며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방식으로 뉴진스를 이용했다. 이러한 모순에도, 아니 그러한 모순 덕분에 그녀의 기자회견은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찍이 헤겔이 여론에는 우연·무지·도착(倒錯) 등이 포함돼 있어 “존중돼야 함과 동시에 또한 못지않게 경멸돼야 한다”고 했을 때 이를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여론이 존중돼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민들이 원하고 생각하는 바를 알려 주기 때문이고, 경멸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민들의 생각을 비조직적인 방식으로 알려 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여론을 “비본질성으로서의 본질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론에 의존하기만 하는 정치도, 그렇다고 여론을 무시하는 정치도 모두 문제적인 까닭은 여론 자체가 지닌 이런 이중성 때문이다. 민희진에게 법적인 절차가 남아 있듯이, 정치 또한 의회를 매개로 하는 조직적인 방식을 택해야 인민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시킬 수 있다.
여당의 총선 패배 직후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건 그가 지금까지는 여론을 무시하는 정치를 해 왔다면, 앞으로는 여론에 의존하기만 하는 정치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총선 패배 직후 나온 국무회의 모두발언은 그러한 변화를 예보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바른’ 국정운영의 기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 그는 총선 패배의 원인으로 올바른 국정운영에도 그것이 ‘체감’되지 못했다는 점을 꼽는다.
왜 그럴까.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수요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만족시켜야 할 국민들의 정책수요가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과반의 국민들에게 가닿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앞으로 국정운영의 방향성 또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아직 충족시키지 못한 정책 수요를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충족시킴으로써 여론을 우호적인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 말하는 ‘정치’란 대중과 행정부가 보다 강력하게 결합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헤겔이 말한 ‘조직적인 방식’을 통해 대중과 행정부 사이를 매개할 ‘의회’의 역할이 여기에는 생략돼 있다. 공론장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여러 의견들이 제시되고 확산되는 과정은 생략되고 대통령의 의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언론매체에 전달해 여론을 환기시키는, ‘측근’들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가 들어선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진짜 의사는 모호해지고 측근을 자처하는 복수의 채널들이 각자 대통령의 ‘뜻’을 내세워 여론의 간을 보며 충돌하는 촌극을 연출하게 된다.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 후임 인선을 두고 벌어진 대통령실의 혼란은 그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인선에 ‘제3의 라인’이 개입하고 있다는 보도부터 ‘특정 비서관’이 조직체계를 무시한 채 의견을 내고 있다는 대통령실의 격앙된 반응이나, 박지원 당선자의 ‘제2의 최순실’ 비유까지. 대통령 주변의 혼란상은 분명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시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지난 2년과 마찬가지로 다시금 대통령의 ‘격노’를 불러일으키겠지만, 격노하기 전에 헤겔의 다음의 문구를 읽고 자신이 어떤 정치인인지를 되짚어 보는 게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전제군주는 국민을 감싸고 돌며 언제나 그의 노여움을 그의 측근에게만 돌리곤 한다.”
여론에만 의존하는 정치를 펼칠 앞으로의 3년이 걱정되는 이유다.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fpdlakstp@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