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산재급여 산정에 기초가 되는 일용직 노동자의 ‘월 가동일수(한 달에 일하는 날)’ 기준을 기존 22일에서 ‘20일’로 낮췄다.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의 산재보상금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근로시간 단축과 공휴일 증가 등 근로여건이 과거와 달라진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사업장을 옮기며 주중·주말 상관없이 일하는 육체노동자의 특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임금 상승 없이 월 가동일수만 줄어들면 산재를 당한 일용직의 손해배상액과 실질임금이 하락한다는 우려도 크다. 이번 판결에 따라 고용노동부 고시도 바뀔 수 있다. 현행 고시는 일용직의 월평균 근로일수를 일당으로 산정하는 단위인 ‘통상근로계수’를 일당의 73%로 정하고 있다. 다만 2개 이상 사업에서 합산 근무일수가 재해발생 전 1개월간 월 22.3일 이상이면 통상근로계수 적용 제외를 신청할 수 있다. 이번 판결로 평균임금이 하락할 가능성이 생겼다.
산재 일용직 ‘손배액 산정 기준’ 쟁점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25일 근로복지공단이 삼성화재해상보험을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 2017년 6월 소송 제기 이후 대법원에서만 3년7개월 심리한 끝에 나온 결론이다.
재판 쟁점은 산재노동자의 일실수입(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장래에 얻을 수 있는 수입)을 산정하는 과정에서 ‘월 가동일수’를 며칠로 볼 것인지였다. 1·2심은 재해자의 월 가동일수를 각각 19일과 22일로 판단해 손해배상액을 산정했다. 산재 손해배상액 산정은 일실수입을 기준으로 정하고, 일실수입 계산은 월 가동일수와 가동연한(노동으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최종연령)으로 결정된다. 월 가동일수가 늘어날 경우 일실수입이 증가해 손해배상 금액이 커지게 되는 셈이다.
더구나 일용직 노동자는 근무일수와 임금이 불규칙해 실질임금을 반영하는 평균임금을 산출하기 어려워 통상근로계수 73%를 곱해 산재급여를 계산한다. 이때 월 근무일수가 평균임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예컨대 일용직 노동자가 일당 15만원으로 한 달에 22일 근무했다면 하루 7만6천원이 휴업급여로 지급된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을 적용하면 월 가동일수 20일 기준으로 7만350원이 된다. 기존보다 약 5천원이 감소하는 것이다.
대법원 “노동부 통계 바뀌어, 근로여건 변화”
대법원이 일용직의 월 가동일수를 조정한 핵심 이유는 ‘근로시간 변화’다. 2003년 9월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며 근로시간 상한이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었고, 2011년 7월부터는 5명 이상 사업장에 확대 적용돼 실질적인 근로시간이 감소했다고 봤다. 대체공휴일과 임시공휴일이 늘어난 점도 짚었다. 대법원은 “연간 공휴일이 증가하는 등 사회적·경제적 구조에 지속적인 변화가 있었다”며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과 일과 삶의 균형이 강조되는 등 근로여건과 생활여건의 많은 부분도 과거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노동부 통계’도 근거로 들었다. 노동부는 매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를 통해 고용형태별·직종별·산업별 최근 10년간 월평균 근로일수를 조사하고 있다. 대법원은 이 통계가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하고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과거 대법원이 도시 일용근로자의 월 가동일수를 22일 정도로 보는 근거가 됐던 각종 통계자료 등의 내용이 많이 바뀌어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게 됐다”고 판시했다. 원심이 사고 당시 관련 통계나 일용직 노동자의 근로여건에 관한 사정을 구체적으로 심리하지 않은 채 월 가동일수를 22일로 판단한 잘못이 있다는 취지다.
“산재 경제적 어려움” 80%, 일용직 타격
이번 판결로 무려 21년 만에 육체노동자의 가동일수 기준이 바뀌었다. 대법원은 1992년 12월 가동일수를 월평균 25일(연평균 300일)로 추정했다가 2003년 10월 22일로 줄였다. 당시 대법원은 월평균 근로일수를 최대 20.5일로 발표한 노동부의 ‘옥외근로자 직종별 임금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최대 월 가동일수를 22일로 판단했다. 이후 하급심은 일용직 노동자의 월 가동일수를 22일로 판단하는 추세를 보였고, 대법원도 이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는 변경된 통계자료 등을 이유로 가동일수를 2일 더 줄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변화된 근로환경과 월평균 근로일수에 대한 통계 등을 반영해 도시 일용근로자의 월 가동일수를 실질에 맞게 인정한 것으로, 향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도시 일용근로자의 월 가동일수는 20일을 초과해 인정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다만 “변화된 시대 상황을 반영해 적용될 수 있는 ‘경험칙’을 선언한 것으로, 판례 변경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며 “모든 사건에서 월 가동일수를 20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증명한 경우에는 20일을 초과해서 인정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대법원 판결이 실무에 미치는 파장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산재를 입는 경우가 빈발해 근무일이 평균임금과 보험급여 산정에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 건설노동자의 산재 이후 상황은 열악하다. 한국노총이 지난 16일 발표한 ‘산재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현황과 실태에 대한 조사’를 보면 산재요양 종결을 경험한 응답자 중 80%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변했다. 건설업이 전체 사업장에서 차지하는 산재 비율은 29.4%로, 제조업(31.1%)에 이어 두 번째다. 건설노동자 67.2%는 산재급여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토로했다.
노동계 “일용직 노동실태 반영 안 한 판결”
대법원 판결이 산재보상의 문턱을 더 높이는 ‘촉매’ 역할을 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노동계는 일용직 노동자의 실태를 외면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노총은 선고 직후 논평을 내고 “일용직 노동자의 실 노동실태를 반영하지 못한 판결”이라며 “일용직 노동자들은 대법원이 언급한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지적했다. 대체공휴일과 임시공휴일에 일용직 대부분은 쉬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어 “이번 판결로 산재를 당한 일용직 노동자들의 손해배상 액수가 줄어들고, 월 노동일수 입증책임까지 짊어지게 돼 육체적 고통에 이어 경제적·정신적 고통이 가중될 것으로 보여 심히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법조계도 일용직의 특성을 간과해 산재보상이 줄어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은영 변호사(법률사무소 문율)는 “주 5일제 도입 당시 실질임금은 하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시간이 줄어 사실상 임금상승 이익은 있었는데, 일용직 근로자의 경우 임금상승 없이 월 가동일수를 줄이게 되면 실질임금을 하락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권두섭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건설현장은 팀 단위로 움직여 작업에 빠지기 어려운 구조라 근무일수가 긴 경우가 많다”며 “그런데 공휴일을 고려했다는 대법원 판결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