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영면에 들어갔다. 향년 77세.
프랑스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았던 그는 생전 이주노조 합법화, 해고노동자 장기투쟁 지원, 비정규직 투쟁 지원에 힘쓰는 등 노동자의 뒤를 지켜주던 든든한 지원자였다. 기본소득 도입,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같은 사회·정치 현안에서도 진보적 의제를 확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노동계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영결식이 열렸다. 고인은 오후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장례는 한겨레 사우장으로 치러졌다.
1979년 한 무역회사의 프랑스 상사원으로 일하던 고인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적발 발표 이후 현지에서 망명을 신청했다. 택시노동자로 망명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 노동계와도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대우자동차 부실 책임을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에 묻기 위해 2001년 2월 프랑스를 찾은 ‘김우중 체포결사대’ 3명과 함께 현지 투쟁을 한 것은 물론 통역·편의제공·길잡이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는 암투병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인연을 되새기며 모금한 후원금을 지난달 직접 홍 은행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2002년 1월 영구 귀국 이후에는 비정규직 투쟁에 줄곧 연대했다. 불법파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촉구하는 희망버스 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2013년 현대차로부터 업무방해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력행위처벌법) 위반 혐의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산재 인정과 사과, 재발방지대책을 촉구하는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의 오랜 싸움에도 글과 행동으로 동참했다. 2018년 12월에는 고용승계와 단체협약 체결 약속이행을 요구하며 굴뚝에 오른 2명의 스타플렉스(파인텍) 노동자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에 동참하며 연대했다.
이주노동자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대법원의 이주노조 합법화 여부 판결을 앞둔 2015년 5월 홍 은행장은 <매일노동뉴스> 특별기고에서 “노조 합법화는 물론 고용허가제를 노동허가제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같은해 6월 미등록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설립하거나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결함으로써 이주노조를 합법화했다.
기본소득 도입과 비례대표제 확대 등 사회·정치 부문에서도 진보적 정책 도입을 주장해 왔다. 노동당과 녹색당에 모두 적을 둔 당원이기도 했다. 고인은 지난해 2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뒤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사회 운동을 계속해 왔다. 진단 2개월 뒤인 지난해 4월 노회찬재단이 주최한 특별강연에서 “세상의 많은 잡초(부조리)를 일거에 없앨 궁리만 할 뿐 아무도 잡초를 뽑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며 “재단 후원 등 조그만 것에서부터 동참해야 사회의 변화 가능성이 열린다”고 주문했다. 그는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한다”고 사회 운동 동참을 호소했다.
노동계는 고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탐욕스런 삼성재벌을 꾸짖고 노동자와 피해자의 편에서 든든한 목소리가 돼 주셨던 선생님 고마웠다”고 추모했다. 보건의료노조는 “행동하는 진보 좌파의 삶을 실천한 홍세화 선생의 명복을 빈다”고 기렸다. 금속노조는 “김우중 체포결사대의 기억을 금속노동자 가슴에 소중하게 묻겠다”고 감사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