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원 객원기자/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윤효원 객원기자/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1940년 11월 일본제국 각료회의는 ‘근로신체제확립요강’을 발표했다. 일제는 본토의 전국노동조합동맹(1930년 결성)과 일본노동총동맹(1936년 결성)을 해산하고, 1940년 11월 대일본산업보국회를 출범시켰다. 모든 경제 단위에서 노동조합은 해체되고, “근로조직”으로서의 산업보국회가 조직됐다. 산업보국회는 일본식 기업별노동조합주의의 모체로 이후 한국의 기업별노동조합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이룬다.

1948년 들어 대한민국 정부 출범을 앞두고 제헌헌법을 논의할 때도 ‘노동’이란 말은 배척됐고, 그 자리를 조선총독부체제의 산물인 근로가 차지했다. 초안에 있던 ‘인민’도 ‘국민’으로 대체됐다. 이렇듯 우리 헌법에 자리 잡은 근로와 국민이라는 말은 지금껏 청산되지 못한 낡은 식민지 유산을 되새기게 한다.

1987년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 이후 근로를 노동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했다. ‘근로자’ 대신 ‘노동자’를 쓰려 노력하고, ‘근로자의 날’ 대신 ‘노동절’로 부르게 된 게 대표적이다. 근로라는 말이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이자, 이후 이어진 독재정권의 반노동 이데올로기라는 각성 덕분이다.

하지만 의욕이 너무 넘쳐 맥락상 근로로 써야 하는데도 억지로 노동으로 바꾸는 역편향도 발생하고 있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에서의 ‘동일노동’이 대표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일노동’이란 말을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서 연유된 것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ILO 협약 어디에도 ‘동일가치노동’이란 말이 없다. 우리가 ‘동일가치노동’이라 번역하는 영어 표현은 ‘work of equal value’인데, 동일가치(equal value) 다음에 오는 말은 노동(labour)이 아니라 근로(work)다. 따라서 ‘동일가치노동’이 아니라 ‘동일가치근로’라 쓰는 게 맞다. 근로라는 말을 쓰기 싫다면 ‘근무’라는 중립적인 느낌의 한자말을 쓰거나 순우리말 ‘일’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노동은 인간에 고유하게 내재된 기능이다. 전 생애에 걸쳐서 노동은 인간의 본질적 행위로 존재한다. 여기서 인간의 노동은 신성하다는 논리가 가능하게 된다. 반면 일은 인간의 본질적 기능이자 행위인 노동이 인간의 심신 밖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자 외화된 결과물이다. 노동이 주체적인 것이라면 일은 객체적이다. 당연하게도 일은 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서 영향을 받는다.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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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하층에 속한 노동자라면 자신의 노동을 저임금 장시간 일(근로)에 소비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노동시장 상층에 속한 노동자라면 고임금 단시간 일(근로)을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노동이 신성하다고 선언해도, 노동의 결과물인 일은 사회계급과 노동시장의 어느 층위에 속하느냐에 따라 양질이 될 수도 있고 저질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이라는 인간 행위의 과정이자 결과물인 일이 역으로 그 시원인 노동의 품위를 결정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악질적인 일이 노동의 품격을 훼손하면서 인간성을 말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노동(labour)과 근로(work)에 대한 혼돈은 대한민국 국가법령집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Labour Standards Act’로 영역해 ‘labour’를 근로라 번역하는 데 반해, ILO 협약 100호에 나오는 ‘Equal Remuneration for Work of Equal Value’는 ‘동일가치노동 동일보수 협약’이라며 ‘work’를 노동으로 번역하고 있다.  

ILO 협약 100호가 강조하는 바는 ‘노동의 가치’(labour value)가 아니라, ‘일의 가치’(work value)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에 따라 노동의 양과 질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노동의 과정이자 결과로서 이뤄진 일의 가치, 즉 근로의 가치가 같다면 그에 대한 보수와 처우도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ILO 협약 100호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협약이 아니라 ‘동일가치근로 동일임금’협약이라 불러야 한다.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윤효원 객원기자ㆍ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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