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과정은 다수결 원칙만을 배타적으로 적용하기를 요구하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이론적 옹호자’(박상훈, 2017)라 불리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1999)의 도발적인 질문이다. 다수결을 채택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틀림없이 어떤 결과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적 결정 과정에서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다수결은 유일한 해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 대화도 선거에서 당선자를 가리듯 반드시 집합적 결정을 내려야 할까.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최종적인 판단 기구가 아니다. 경사노위는 의결기구나 심의기구가 아니라 협의기구일 뿐이다.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며 협의하되 합의를 최종 종착점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사회적 대화의 협의 내용을 검토한 후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단위는 국회나 정부다. 사회적 대화로 합의한다고 반드시 이행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합의가 있어야 정부나 국회가 정책을 집행하거나 법을 제정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의 과정은 비록 그것이 어떤 공식적인 합의나 협약을 체결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책형성에 직접 기여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몇 나라에서 밝혀졌다. 사회적 대화의 목적을 오로지 협약을 체결하는 데 둔다면 사회적 파트너들의 질적 투입보다 합의라는 결과가 성공의 유일한 지표로 간주된다. 이는 대화의 최종 목표라는 점에서 유연하다기보다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과정’(stop-and-go process)이 될 수 있다.”(Guardiancich, 2017)
사회적 대화가 합의를 약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풍선에 공기가 빠진 듯 허전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언론에서는 다반사로 “사회적 대화, 또 결렬”이라는 표현을 쓰며 사회적 대화 무용론을 주창하고 나설 것이다. “성과도 없이 예산이나 낭비하는 조직”이라는 비판도, 위원장이나 상임위원의 무능에 대한 질타도 이어질 것이다. 합의 없는 협의는 말 그대로 무용한 것인가. 렘브루흐(Lembruch, 1979)의 말마따나 정책협의는 그 자체로 사회적 대화의 실질이 될 수는 없을까.
협의의 역설
협의가 갖는 기능적인 장점이 적은 것도 아니다. 우선 사회적 대화의 운영이 느슨해지고 유연해진다. 모든 이해당사자가 반드시 참여할 필요성도,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부담도 줄어든다. 양보해야 한다는 강제가 없다면 참가의 부담도 그만큼 덜어질 것이다. 협의라는 것은 결국 참여하는 각 주체에게 거부권을 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정 당사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결을 한들 반대한 당사자가 승복할 리도 없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사회적 대화를 협의 중심으로 운영할 경우 민주노총이 들어오지 않을 이유도 별반 없거니와 들어오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될 일도 없다. 어느 한 주체가 빠졌다고 협의를 진행하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관심 있는 당사자들이 만나 협의하고 합의가 이뤄지면 또 그만큼 존중하면 된다. 당사자로서도 합의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만큼 참가하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의제설정도 한결 용이해진다. 합의의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의제의 우선순위 설정이 사회적 대화의 첫 허들이라면 이는 사회적 대화의 운영에 따르는 부담을 완화한다. 실제로 사회적 대화는 의제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샅바싸움으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협의가 합의의 부담을 없앰으로써 합의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기도 한다. 협의의 역설이다. “양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없을 때보다 공개적이고 허심탄회하게 모든 문제를 토론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기도 한다.”(권형기, 2014)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부담 없는 협의가 상호이해의 폭을 넓혀 합의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상대방을 탓할 이유도 없다. “신뢰 없는 상태에서 합의의 추구는 갈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책임 추궁을 야기한다.”(정흥준, 2023)
사회적 대화라 쓰고 사회적 협의라 읽는다
실제로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이면에는 합의가 어려울 거라는 상황인식이 존재한다. 노사 정상조직이 양보할 수 있는 중앙의 권한이나 리더십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우선적인 이유다. ‘양보를 통해 합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양보 자체를 패배로 인식하는 것도 노사가 마찬가지다. 절반을 나눠 갖는 지혜보다는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라는 양자택일이 앞서는 이유다. 노사가 단기적인 이해 대신 장기적인 전망을 나눠 가질 만큼 상호 간에 신뢰나 파트너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노사 사이의 합의 기반이 무논처럼 무른 가운데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사회의 구축을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사회적 ‘합의’를 당부했다. ‘한국’의 사용자단체가 노동존중사회의 구축에 동의할 수 있을까. 그걸 기대한다는 것은 고욤나무에서 감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건 아닐까. 개악을 막는 것도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는 이유의 하나라면 사용자단체로선 오히려 사회적 대화에 참여해 합의를 방해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사실상 합의가 어려운 구조에서 합의만을 유일한 성과로 인정하는 모순된 상황에 놓인 것이 사회적 대화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사회적 대화에서 특정 주체가 소수라는 이유로 다수의 지배를 용인할 수밖에 없다면 소수는 공론장을 떠나거나 불참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공론장 바깥에서 갈등을 재생산하거나 증폭시키려들 것이다. 무리하게 합의를 추구하다가는 자칫 사회적 대화 자체를 질식시킬 수 있다. 사회적 대화가 갈등을 완화하고 종식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에 반해 협의는 상대방의 입장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걸 이해할 수는 있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신뢰를 만드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고도갈등상황에서 … 갑자기 타협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갑자기 입장을 바꾸는 일도 없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그들은 상대방의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포용력을 갖추게 된다.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가 바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호기심이 되살아난다. 인간성이 회복된다. 지능이 다시 작동한다.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서로의 힘을 갉아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하고 좋은 일이 된다.”(아만다 리플리, 2022)
여러 사람들이 나한테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는 가능하다고 보는가?”라고 묻는다. “그건 사회적 대화를 뭘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게 나의 답이다.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본다면 가능하겠지만 합의로 보면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사회적 대화가 그것 하나에 좌우될 만큼 단순한 게임은 아니다. 농담같이 하는 말이지만 나로서는 상당한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합의가 어려운 구조에서 합의를 목표로 삼는다는 건 실패가 예정된 대화일 뿐이다. 사회적 대화라 쓰고 사회적 협의로 읽는 것, 그것이 내가 사회적 대화를 읽는 독법이다.
협의란 논의를 통해 소수자에 대해서도 타협하고 조정함으로써 단순한 다수를 넘어 다수의 규모를 최대로 만드는 과정이다.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한다는 것은 정부가 자신의 정책을 수행하거나 입법화하는 수단으로 합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즉 노사중심성의 원칙을 수용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협의중심의 원칙은 노사중심성의 원칙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사정위원회가 추구했던 국가 경쟁력을 강화를 우선하는 ‘경쟁력 코포라티즘’을 포기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노사중심성의 원칙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