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한 배경에는 민주노총의 강한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주체들도 이미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가 ‘합의를 지향하는 협의기구’라는 사실에 합의하고 있었던 터라 민주노총의 제안이 뜬금없는 것은 아니었다. 협의가 합의의 도출을 배제하지 않을뿐더러 적극적으로 다수자의 최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합의를 지향하는’이란 건 비 온 뒤에 물주기만큼이나 불필요한 수사였다.
민주노총이 협의기구로서의 성격을 요구한 배경은 짐작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정부의 반노동정책에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의결된 사항이 부메랑처럼 노동의 희생과 노동에 대한 화살로 되돌아오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의결 과정에서 노동계의 거부권이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한국노총과 공조가 이뤄질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사회적 대화기구가 지난 시기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 하에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정부정책 추진의 들러리 수단으로 전락한 노사정위원회의 부작용과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 취지에 충실한 ‘협의기구’로서 그 위상을 분명히 하고 출발해야 한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제2차 노사정대표자회의(2018년 4월3일)에서 밝힌 내용이다. 달리 해석하면 민주노총 지도부로서는 강력하게 사회적 대화에 결합하겠다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민주노총으로서는 자신들도 참가한 가운데 의결된 사항에 반대해 투쟁을 조직한다는 건 명분이 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회적 대화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방안이다. 투쟁의 명분을 살릴 수 있을뿐더러 조합원으로부터 실리도 못 챙기고 양보만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하면 이러한 우려는 사라진다. 민주노총이 특정 사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의결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협의기구에서는 모든 참가자가 거부권을 갖는다.
민주노총 주장한‘협의기구’ ILO도 인정한 국제 흐름
사회적 대화가 협의를 주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2018년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논의되고 있었다. 박명준·장홍근(2017)이 대표적이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는 어디까지나 합의의 강박관념을 떨쳐버리고 협의 자체를 중요시하면서 참여 주체들 간의 스킨십을 일상화시켜 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합의지향적 협의기구’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해야 한다”.
사회적 대화가 협의를 기본으로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사회적 대화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발간한 문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대화는 합의 체결보다는 협의하는 과정을 중시하며 그것이 역설적으로 신뢰의 형성은 물론 합의의 형성을 돕는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적 대화에서 흥미로운 발전은 사회적 대화의 과정에 더 큰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대화는 사회협약이나 합의를 체결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갖지는 않는다. 대신 강조점은 실질적인 과정과 이를 통해 사회적인 파트너와 정부가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정책을 설계하는 데 놓인다. 이는 관련된 이해당사자 사이의 신뢰를 쌓는 걸 용이하게 만든다. 사회적 대화가 합의를 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 교섭에서의 실패는 상호 비난과 불신으로 이어진다. 반면 과정 그 자체에 초점을 놓을 경우 이런 위험은 줄어든다.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이슈에 대해 점진적으로 합의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돕는다.
경사노위법서 의결조항 없애지 못한 아쉬움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하자고 제안하면서 구체적으로 요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협의기구에 걸맞게 경사노위법에서 의결조항을 삭제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합의 이행조항이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가 협의기구라면 의결조항과 합의 이행조항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법으로 협의기구로 규정되었다. “고용노동정책 및 이와 관련된 경제·사회 정책 등을 협의하고”가 그것이다. 운영과정에서도 합의제를 관행으로 확립했다. 노·사·정과 경사노위가 참가하는 운영위원회와 의제개발조정위원회가 그것이다. 하지만 의결조항은 의결요건이 강화되는 형태로 살아남았다.
노사정위원회 당시 의결조항은 “위원회의 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개의하고 출석위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로 되어 있었다. 경사노위법에서는 위원회의 개의 요건을 “재적위원의 3분의 2 이상으로”로 고쳤다. “위원회가 의결을 할 때에는 근로자를 대표하는 위원,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 및 정부를 대표하는 위원 각 2분의 1 이상이 출석하여야 한다”라는 조항은 유지했다. 요컨대 위원회의 개의를 어렵게 했으며 개의를 하더라도 어느 한 당사자의 과반수 출석이 없으면 의결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었다. 협의로 규정함으로써 사회적 대화를 유연하게 운영할 여지가 생길 뿐 아니라 민주노총의 참가를 막는 걸림돌의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고 봤다. 역으로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하면 다른 사회적 주체들로서는 민주노총의 참여가 덜 중요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빠진다고 해서 협의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합의가 이뤄지면 또 그대로 (노사정위원회에서 했듯이) 후속조치를 진행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하면서 후속조치로 의결조항을 살려야 했을까, 그리고 합의의 이행조항을 삭제해야 했을까”. 사회적 대화에서 협의를 강조한다면 의결조항은 필요가 없을 수 있다. 위원회의 운영에 관한 사항은 필요에 따라 의결이 필요하겠지만 운영위원회와 의제개발조정위원회가 사실상 합의제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이마저도 필요 없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당시 민주노총의 주장은 좀 더 깊이 있게 논의할 가치가 있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2019년 경사노위에서는 노동법학자와 행정법학자들을 초청해 경사노위법과 시행령을 검토하는 연속 간담회를 진행한 적이 있다. 당시 전문가들의 다수는 경사노위는 의결 혹은 심의위원회가 아니라는 사실, 따라서 경사노위를 의결기관으로 구성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들은 본위원회의 회의규정에서는 개의정족수 요건만 규정하고 의결규정은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경제사회노동위원회, 2019).
한편 합의 이행조항(“위원회에서 의결된 사항의 이행에 관한 사항”)은 위원회의 기능에서 삭제했다. 하지만 이 조항은 필요했을 수 있다. 협의라고는 하나 합의가 이뤄졌다면 그 이행을 점검하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뒷날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국회로 자리를 옮겨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2021년3월). 사회적 합의 정신이 존중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위원회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에 따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의결사항과 관련된 안건을 심사할 때에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존중해야 한다”.
사회적 대화는 합의를 목표로 삼고 합의를 성과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오래고 힘든 논의의 과정조차 에너지의 낭비로 치부되어 버린다. 합의를 산출하지 못한 사회적 대화는 이해당사자 사이의 갈등만 증폭하는 걸로 이해됐다. 이처럼 합의 지향성은 제도의 설계는 물론 운영과정에서 사회적 대화를 규정하는 기조로 자리매김됐다. 그렇다면 합의 없는 협의는 낮달만큼이나 무용한 것일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