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흡 한반도메밀순례단장

냉면은 면을 압착, 분창(크기에 따라 면의 가늘고 굵은 정도를 조절하는 구멍 난 통)으로 뽑아내는 메밀국수에 고명과 육수를 더해 사계절 차게 먹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음식이다. 냉면은 무미(無味)의 미(味)라는 역설 위에 존재한다. 육수는 맹물처럼 밍밍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란 말인가. 맛의 구체성을 확인하기 어렵고 손수 만들어 먹기도 어렵다. 제분과 반죽 즉시 면을 뽑아야만 메밀의 곡물 향, 수줍고 은은한 단맛이 겨우 코와 입에 닿는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꿩고기를 삶아 내 만드는 최고의 육수라고 하지만 차가운 온도에서 육향을 맡기란 쉽지 않다. 무엇인가 계속 첨가해서 오감을 만족시키는 음식과는 정반대다. 백석이 정의한 슴슴한 맛. 여러 번 먹어 봐야 숨어 있던 민족 DNA가 깨어나 어느새 자리 잡는 소울푸드. 겨울 동치미 냉면은 365일 그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어려웠다. 동치미와 육수의 만남, 그리고 육수의 독립이 맹맹한 냉면을 낳았다.

역대급 냉면 마니아 고종이 사랑한 ‘배동치미냉면’은 결이 다르다. 고종은 단 음식을 좋아해 궁궐에서 배 동치미를 큰 항아리에 담갔다. 수저를 이용해 배를 초승달 모양으로 파면 즙이 훨씬 잘 나온다. 얼음 가루를 뿌린 듯 냉면에 배꽃이 핀 것처럼 올리고 그 위에 소고기 편육을 열십자 모양으로 얹고 황백 지단과 꿀, 잣을 넣는다. 동치미의 감칠맛, 꿀맛, 배의 시원한 단맛이 얹혀 있다. 배와 오이, 황백 지단 세 가지 고명은 냉면의 모든 역사와 함께한다. 동치미 국물이 들어간 육수에 배가 고명으로 듬뿍 오른 평양냉면. 입문자에게 권한다.

1964년 동두천에 정착한 실향민 부부는 동치미 평양냉면집을 연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 아버지, 음식 솜씨가 뛰어났던 황해도 사리원 출신 어머니. 실향민이 모여 살던 곳에서 문전성시를 이룬다. 2대 박영수 대표가 ‘동신명가’로 명명했다. 동두천, 서울 강동구를 거쳐 2021년 서초역 부근에 자리한 60년 역사의 백 년 가게. 맛의 대를 이은 사람은 음식엔 문외한이었던 박 대표의 아내이자 며느리 김문자씨. 시어머니 요리법을 계승했다.

메밀 함량 겨울 70%, 여름 60%에 고구마 전분을 더해 면을 뽑는다. 굵기가 있는 연갈색 면은 매끄럽다. 부드럽게 끊어진다. 양지 육수 95%에 동치미 국물 5%를 더한다. 동두천에서의 동치미 비율은 30%. 동치미 특유의 산미를 싫어하는 입맛의 변화 탓에 육수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정도로만 동치미를 넣는다. 고명으로 오른 무와 오이절임이 짠 편이어서 호불호가 있다. 채 썬 배는 동치미 국물에 담겼다가 고명으로 듬뿍 오르는데 아삭함이 살아 있다. 배 채에서 고유의 배향을 느끼는 경험은 신선하다. 무형문화재 22호 김선억 선생이 제작한 놋쇠그릇을 30년 넘게 사용하고 있다. 떡갈비와 백김치를 메밀면과 함께 먹는 것은 행복한 동행이다. 냉면+고명에 불고기 등 다른 음식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평양냉면의 맹맹함은 오히려 맛의 균형을 맞추는 절묘한 절제의 결정체가 아닐까 한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현역으로 현장을 지키며 평양냉면의 전통을 이어 가겠다는 노부부의 다짐이 동신명가를 이끌어 가는 힘이다.

 

한반도메밀순례단장 (pshstart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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