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지금은 노동정치 1기의 마무리 과정이다. 민주노동당 출범으로 큰 충격을 줬던 초기의 실험은 의미 있고 대단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노동정치는 기존 정치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제 노동정치 1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져야 할 때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출발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는 궁리다.

선거를 앞두고 조급해할 필요 없다. 이번 선거 이후 양당은 몰락할 것이다. 선거 이후가 더 중요하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의제일 수밖에 없다. 변화의 시대는 곧 올 것이다. 긴 시간을 들여 미래를 궁리해야 한다. 새롭게 출발하면 기회는 늘 있다. 노조는 가장 힘센 집단이다. 자신감을 갖자.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60·사진)이 선거를 앞두고 다양한 행보를 보이는 진보정치와 노동계에 던지는 조언이다.

박상훈 초빙연구위원은 민주주의 연구에 천착해 온 사람이다. 사회과학 도서를 다루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의 대표를 지냈고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지냈으며, 최근에는 <혐오하는 민주주의 : 팬덤 정치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를 출판해 정치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박상훈 초빙연구위원을 만났다. 지금의 정치지형에 대한 진단과 그 속에서 축소하는 노동자 정치와 진보정치의 앞날을 물었다.

팬덤 정치로 모든 의제 사라진 선거
“올해 총선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나진 않을 것”

- 거대 여야와 제3지대는 이번 선거를 운동권 심판, 정권 심판, 양당 심판 등으로 규정한다. 이번 선거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각 정당들은 이번 선거가 정국 분수령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아니다. 새로운 가치나 이념이 나오거나 그간 대표되지 않던 집단이 등장하거나 지지집단이 교체가 되는 선거를 ‘중대 선거’라고 하는데, 이번 선거는 중대 선거가 아니다. 당연히 노동 의제가 크게 진전된다거나 그런 선거도 될 수 없다. 노동운동이 이번 선거에 너무 매몰될 필요는 없다.”

- 우후죽순으로 발생하는 제3당이 의석을 차지하게 되면, 기존에 없던 세력이 등장하는 것이니 중대 선거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제3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이번 선거를 중대 선거라고 하지만, 그들은 (권력을 쟁취할) 여지가 보이니 등장한 세력일 뿐이다. 양당 독과점 구조가 사회를 넓게 포괄하지 못하고 거대 여야가 각각 당을 통합할 능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언론이 진영정치나 양극화 정치를 그만하라고 하니 제3당의 공간이 열린 거다. 우리나라에서 제3당이 없었나. 1992년부터 있었다.”

- 노동 의제가 크게 진전될 수 없다고 보는 이유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가 저열해져서 그렇다. 현대 정치는 팬덤 정치다. 누가 상대를 더 잘 혐오하고, 야유하는지만 중요하다. 이런 선거에서는 노동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사회적 의제도 논의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 의제란 대정부·여당 투쟁을 할 때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 지난 정부를 보라. 노동 의제의 진전은 없었다. 노동 의제가 폭발되지 않도록 관리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진보정당은 마침표 찍는 중
기회는 늘 존재, 지금은 마무리 잘해야 할 때”

- 이번 선거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등장한 진보정당들이 지지세가 떨어져 원내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이들이 원외로 밀려도 상관없다는 것인지.

“지금은 노동정치 1기의 마무리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원내 진입에 성공하면서 새로운 기반과 정책, 가치, 이념을 들고 정치에 충격을 안겼다. 그 노동정치의 흐름이 지금 정의당에 와서 마침표를 찍고 있는 과정이다. 민주노동당 출신들이 거대 양당으로 많이 들어가지 않았나. 결국 기존 정치 안에서 자리를 못 잡고 힘들어하며 마무리되는 것 같다.”

- 왜 1기 노동정치가 마침표를 찍게 됐을까.

“진보정치는 한국 사회의 설렘을 부여하고 진보 의제 발굴에 기여했다. 그걸 진보정치가 계속하며 정치적으로도 성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진보정당들은 양당 독과점 구조에 정신적으로 굴복했다. 시민정당이 되려고 했다. 지지자가 늘기를 바라며 당을 개방하고 외부 영입을 하고, 후보 개인이 빛나고, 그러면 지지자들이 몰려올 것 같은 허상을 갖고 정치를 했다. 그렇게 정당의 기반이 무너졌다.

진보정치는 어려운 길이다. 어려운 곳에 오랫동안 헌신하려면 동기부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활동가들을 지치지 않게 하는 게 모든 정당, 특히 보상이 약한 진보정당의 핵심이다. 진보정당의 꽃은 활동가다. 그런데 헌신해 봤자 보상이 없었다. 활동가들이 애정과 충성심을 지속하기가 참 어려웠다. 지친 활동가들은 외부로 갔다. 지금 거대 양당을 보면 민주노동당 출신들이 상당히 많다. 반성적으로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 지금 진보정치가 원외로 퇴장하면 앞으로를 기약할 수 있을까.

“물론 재진입이 가능하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거대 양당을 보면, 노동을 완전히 무시하고 집권할 수는 없다. 대표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이제 보수에서도 받아들이는 의제다. 어차피 노동·진보정치의 기회는 늘 주어져 있다.

지금은 진보정치가 만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상황에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절망의 기준이 될 이유는 없다. 한 회사를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회사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게 우리네 삶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잘할 방법을 모색해야지.”

“가설 연합정당은 가능하지 않아
노총 선거 방침도 있을 필요 없어”

- 진보정당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된다면 지금처럼 생존할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는데.

“선거제도는 가짜 의제다. 지난 10년간 그게 무슨 이슈였는지 돌아보라. 선거제도는 진보정당들이 원한다고 바뀌지 않는다. 본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의제다. 큰 세력들의 전리품이 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 제3정당에 유리한 선거제도란 있을 수 없다. 지난번에 불완전하지만 합의를 해서 선거를 치렀지 않나. 이를 가지고 진짜 의제에 힘을 썼어야지, 선거제도만 가지고 에너지를 낭비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그렇다면 진짜 의제는 무엇인가.

“조직과 당내 공천 제도다. 선거제도의 1법칙은 조직력이 강한 정당이 어떤 선거제도 안에서도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조직을 잘하면 이전 선거제도에서라도 노동자 세력화는 이룰 수 있다. 진보의 무기는 조직 아닌가. 여기에 힘을 썼어야 했다.

당내 공천 제도도, 당내에서 공직 후보는 누가 돼야 하는가. 이와 관련해 전통도 만들고, 논의도 했어야 했다. 지금처럼 제도에 의탁해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 한다면, 앞으로도 기회가 있지 않을 것이다.”

- 정의당은 당내 공천 제도에 논란을 겪었다. 이번에도 비례대표 1번 명부 후보를 노동 관련 인물로, 완전국민경선제(오픈 프라이머리)를 통해 선출하겠다며 노동정치를 시도하고 있다.

“정의당의 고육지책이라고 본다. 어떻게든 ‘노동자 정당’으로서의 위상은 갖고 싶은데, 현재 정의당의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다. (노동자 정당이라는) 상징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앞서 말했듯, 정의당은 진보정치를 개척하는 방법에서 너무 쉽게 시민정당이 돼 성공하고 싶었다. 정의당이 민주노동당의 연장이라고 봐야 하는지부터 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 않나.”

- 진보당은 원외에 가설 정당을 만들어서 ‘최대 진보연합’을 주장한다. 거대한 진보연합체가 탄생할 가능성은 없나.

“시대착오적이다. 민주노총이 주도해서 정당을 만든다는 것은, 노조가 정당을 만들겠다는 건데. 그런 사례는 전 세계를 뒤져보면 111년 전 노동당 사례가 있다. 영국에서 중도좌파 정당이 나오기 전부터 노총이 지식인들, 자유당 내 노동 블록을 합쳐서 만들어냈다. 지금 한국에서 가능하지 않다. 자기네들끼리의 일로 끝날 거다.

진보당의 정치 방침이란 건 보수적이다. 하나의 권위에 종속된 느낌이 든다. 실리를 취하는 정무적 감각은 있는데,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법인지는 모르겠다. 권위주의 시대 운동권 느낌이다. 진보당 활동가들의 헌신성은 높게 보지만, 그것도 방향성이 잘 맞춰져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시대가 저물던가, 현대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 선거방침 결정을 앞두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 내부에서 갈등이 있다. 노총의 선거방침에 대해 어떻게 보나.

“선거방침 자체가 문제다. 대체 선거방침을 왜 정하나. 자꾸 선거를 신경 쓰다 보면 결국은 양대 정당에, 선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노조는 독립적인 정치적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 시대에서 정당과 노총의 목소리는 합쳐지지 않고 나란히 가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된다 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은 돈과 표를 갖고 있다. 선거를 실리적으로 이용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맞다. 돈과 표를 갖고 있으면 어느 정당하고도 실리적으로 대화하고, 그들을 이용할 수 있다. 민주노총에서 강의할 때마다 정치방침 정하지 말자고 조언했다.

한국노총을 보면 양대 정당을 통해 실리를 잘 취해 왔다. 한국노총 지도부 출신 의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지 않나. 다만 그들이 조직, 노동 의제를 진전시키는 역할을 해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건 아쉽다. 그들에게 책임성을 담보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정말 필요하다면 각서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데 사실 기존 정당 틀 안에서는 각서를 써도 통제가 잘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아예 개별적으로 세력화하자, 제3당의 어딘가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해야만 할 텐데, 그 때가 정치세력화를 다시 시도할 시기라고 본다.”

선거 이후에 거대 정당 힘은 약화할 것
활동가 늘리고 일상에 스며드는 정치교육 해야

- 그렇다면 지금 노동진영의 과제는 무엇인가.

“노동문제에 대한 자기 해석이 필요하다. 지배 담론이 된 민생의제에 노동은 하위 의제로만 작동하는 상황이다. 민생은 노동운동, 민중생존권 같이 다소 계급·계층적인 민생론이 있고 이와는 관계없는 민생 의제라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민생 의제가 국민경제, 비쟁점이라는 말과 붙어서 민중생존권적 민생은 어그러져 버렸다. 그런 민생의제로부터 노동 의제가 독립해야 한다. 민생으로 깔아뭉개진 노동 의제가 민생에서 독립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비판적인 노동 의제를 형성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종속된 의제로 끌려간다.

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를 보라. 처음에는 노동 문제에 결합했지만, 점점 민생 문제에서 을들을 보듬어준다는 온정주의식으로 운영된다. 아버지가 백성을 걱정해 주는 느낌처럼 변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하려면 민생 담론과 겨룰 수 있고, 이와는 결을 달리해서 노동 문제에 대한 자기 해석이 튼튼하게 돼야 한다.”

- 그렇다면 지금 진보정당들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새로운 출발을 만들 수 있느냐를 논의할 때다. 감정으로 상처를 주며 여력을 소진하지 않는 게 마무리의 현명함 아닐까. 물론 선거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겠지만, 성과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새로운 출발을 할 때라고 말하고 싶다. 20년의 경험을 잘 반추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변화는 곧 온다. 지금 선거 이후 거대 여야 대표들에게는 지옥이 시작될 것이다. 총선으로 대통령, 당대표보다 임기가 긴 의원 300명이 등장한다. 지금도 지지율이 낮고, 거부권 없이는 운영이 안 되는 정부다. 보수 언론도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은 게 현 정부다. 야당이라고 다른가, 역대 최단기간으로 도덕적 권위를 상실한 집단이다.”

- 노동자 정치세력화 2기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노조의 상징자본이 필요하다. 영국의 경우 노총이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 대학이 있다. 조합원들이 모이는 서점도 있고, 노총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도 있다. 우리도 지역사회 사람들의 삶의 조건에 맞는 연구도 하고, 행사도 하면서 그들의 삶에 들어가야 한다. 노조 활동가, 지도자들이 패션도 신경 쓰고, 멋도 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 시대에 민중총궐기대회를 통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변화를 만들겠다는 건, 어쩌면 대중하고 유리된 구호만 외치겠다는 것 아닌가. 정파들의 자기위안으로만 비칠 수 있다.

양대 노총에는 돈을 내는 조합원들이 수백만 명이 넘는다. 1천만 당원 시대라지만 유령 당원들이 대부분인 거대 여야를,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장악할 수도 있다. 다만 설득력 있는 계획을 아직 제대로 만든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렇지.”

- 양대 노총의 고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노총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민 집단이다. 가장 많은 표와 돈을 갖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늘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이 노조 때리기를 하지만 지지율이 크게 상승했는가. 50%대 지지율로 출발해 30%대 초중반의 지지율을 오가는, 역사상 가장 빠르게 레임덕이 온 정권이다. 민주당이라고 다를까, 그들도 도덕적 권위를 상실한 상황이다.

선거 이후 이들은 다시 분열할 것이다. 그때마다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표를 얻으려 할 것이다. 잘 준비되고 조직된 곳이 선거 이후의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노총은 그곳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자원들을 최고로 많이 가지고 있다. 냉소를 버리자. 자신감을 갖고, 가진 힘만큼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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