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권력구도가 바뀌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사실 솔직히 말하면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좋은 지방정부'가 구성되고, '좋은 대통령' 또는 '친노동적 대통령'이 뽑히도록 해야 한다는 교과서 구절 같은 막연한 원론밖에는.
지금과 같은 정치문화 아래서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투표하는 것뿐이다. 올해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유권자 수는 대략 3천5백만명 정도이다. 투표율을 60% 수준으로 잡는다면 유효투표는 2천1백만 표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 나라 선거는 1표라도 더 많이 얻은 후보가 당선되는 이른바 '단순종다수투표제'이므로 절반에서 한 표만 더 얻으면 확실한 당선이다. 아니 절반을 못 얻어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노태우는 3분의1 정도의 표만 얻고도 대통령이 되지 않았는가.
만일 1천만 노동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투표에 참가하고, 그것도 똑같은 사람을 찍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일치단결해서 '친노동적 후보'를 찍으면 '친노동적 대통령'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왜? 노동자들의 투표율이 특별히 높지도 않고, 또 노동자들이 노동후보나 친노동후보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무엇으로 투표를 하는가. 아마도 노동자들이 투표하는 가장 큰 판단기준은 지역이 아닐까. 물론 노동자들만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온 나라가 선거 때만 되면 마치 미쳐버린 듯 지역으로 갈라지는 현실이니까 말이다.
20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12월에 국회 앞에서 노동자들이 천막농성을 벌였다. 노조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 문제로 노·사·정이 팽팽하게 맞선 것이다. 그 때의 기본 대립은 자본(회사) 대 노동(노동조합)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이 대립구도는 몇 달 가지 못했다. 4.13 총선 때 이 구도는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서로 맞서던 자본과 노동이 같은 편이 된 것이다. 지역이 같다는 것만으로. 영남을 기반으로 한 자본과 영남 출신의 노동자들이 한 편이 되고, 호남을 기반으로 한 자본과 호남 출신의 노동자들이 그에 맞서는 다른 편이 된 것이다. 함께 힘을 합쳐 자본과 맞서던 노동자들은 분열되어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되었다. 단지 너와 내가 태어난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철저하게 무시될 수밖에 없다. 오직 내가 태어난 지역의 이해관계만이 전면에 나설 뿐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가 태어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의 당선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 정치인이 과거에 인권유린을 했건, 노동자들을 탄압을 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 정치인이 친노동자적 성향인지 아니면 반노동자적 성향인지 그게 무슨 관계가 있으랴. 피는 물보다 진하고 '땅 힘'은 '바른 생각'보다 강한 것을.
1997년의 15대 대통령선거와 2000년의 4.13 총선이 아주 좋은 예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 국민승리21의 후보로 출마했던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얻었던 표는 민주노총 조합원 숫자보다도 적었다. 4.13 총선에서도 민주노동당은 단 한 석을 얻지 못했다. 기본 득표도 못하는 바람에 당이 해체되었다가 재창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한국노동운동의 메카라는 울산 지역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는 떨어졌지만 노동운동을 탄압했던 대재벌 현대 그룹의 후계자는 당당히 당선되었고, 지금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이 같은 어리석음을 올해에도 되풀이할 것인가.
노동자의 힘, 노동의 힘을 올해의 양대 선거에서 보여줄 방법은 없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