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나는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사회복지는 실용학문답게 방학 때면 2~3학점씩 주는 현장실습을 두 번 해야 졸업이 가능했다. 첫 실습은 잃어버렸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보호하는 아동일시보호소에서 했다. 근무자는 첫날 내게 “절대 아이들을 함부로 안지 말라”고 당부했다. 버려진 아이들이라 안아주면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한 명이 여러 명의 아이들 돌보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지막 현장실습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88년 여름방학 때 홀트아동복지회에서 했다. 홀트는 한국전쟁과 밀접하다. 미국인 해리 홀트가 1955년 10월에 설립해 한국 아이들의 입양을 알선했다. 지금은 병원도 운영하고 비혼모와 장애인, 다문화가정을 돕는 등 여러 사업을 하지만 50년대 설립 당시엔 전쟁 고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해외에 입양하는 게 주요 사업이었다.

홀트에서 실습하던 시기는 전쟁이 끝난지 35년이나 지난 88년인데도 한 해에 수 만 명씩 해외입양을 보냈다. 오죽하면 북한이 휴전선에서 대남방송으로 ‘남한은 아이들도 수출하는 미개한 국가’라고 욕했다.

만 1~2세쯤 되는 아이들을 부산의 고아원에서 김포공항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가는 게 내 실습의 주요 업무였다.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5시간 반가량 서울로 이동하는 동안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대소변을 챙겨줘야 했다. 공항에 가면 가난한 유학생이 아이를 받았다. 미국까지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를 돌봐주면 홀트가 항공료를 지원해줬다. 새벽에 부산의 외곽에 있는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 받아 김포공항에 아이를 인계해주고 오후 4시가 넘어서 마포에 있는 홀트에 보고하면 하루 일과가 끝났다.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당시 서울 마포구에 있던 홀트복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근무자는 새로 부임한 높으신 양반(회장)의 이런저런 요구에 힘들어 했다. 전두환과 함께 신군부 쿠데타에 참여한 육군 소장 출신이 홀트에 회장으로 부임해 직원들 군기를 잡았다. 복지에 ‘복’자도 모르는 군인이 이런 자리에 앉아도 누구 하나 입도 뻥긋하지 못하던 이상한 세월이었다. 하긴 전두환이 집권하고서 내세운 제1의 국가정책이 ‘정의사회 구현, 복지국가 실현’이었다.

홀트 직원은 이화여대에서 복지를 전공한 분이었는데 ‘아이 수출’이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라고 했다. 당시 아이를 입양 받은 서양인 양부모는 아이 1명에 5천 달러 정도를 홀트에 후원금으로 낸다고 귀뜸해줬다.

내가 아이를 받아간 부산의 고아원 원장은 10년 뒤 국민의힘 전신인 정당의 줄을 타고 부산에서 민선 구청장을 지냈다.

한겨레가 4월17일 12면에 ‘지인 청첩장 만들라, 마트 운전하라… 홀트 원장 도넘은 갑질’이란 제목의 머리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묻어두었던 35년 전 씁쓸한 기억이 살아나 소름 끼쳤다.

한겨레는 홀트복지회 고양보호작업장 원장이 마트에서 장 보는데 직원에게 운전시키고 아들 결혼식 때 식권 제작도 떠넘기는 등 직원을 자기 개인 심부름에 동원했다고 보도했다. 원장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사적 업무는) 아들처럼 생각해서 시킨 거”라고 해명했다.

홀트가 반세기 넘게 한국에서 수많은 좋은 일을 했지만, 중간에 군인 정권이 끼어들어 설립 정신을 비틀어 버리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문제를 덮을 뿐, 문제를 절대 치유하진 못한다.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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