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훈 변호사(법무법인 시민)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테스라는 괴물이 등장한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잠자리도 제공한다. 그는 맞는 침대가 있다며 나그네를 눕힌 다음, 침대보다 키가 크면 남는 목이나 다리를 잘라 버리고,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춰 늘리는 방법으로 나그네를 살해했다고 한다. 21세기 한반도에 프로크루테스가 등장했다. 침대가 아닌 ‘근로시간’의 형상으로.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자.

정부는 2023년 3월6일 “근로시간 제도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취임 초기부터 달리던 근로시간 규제 철폐 내지 완화의 ‘빌드 업’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1주 12시간으로 제한한 연장근로시간의 산정단위를 월, 분기, 반년, 연간으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평균의 함정으로 인해 특정주에 가능한 연장근로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정부가 보완책으로 제시한 △근로일간 11시간 연속휴가 제도 △4주 평균 64시간 이상 금지 △산정기간 연장시 총 근로시간 비례적 감축 등을 적용하더라도, 1주일 69시간 근로가 가능해진다. 주휴일을 부과하지 않는 위법을 얹을 경우 1주일 80.5시간까지 가능하다. 그런데 월별로 산정하면서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째 주에 이런 장시간 근로를 부과한다면? 7월 평균과 8월 평균이 적법하므로 문제가 없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인간의 노동은 휴식을 통한 재생산이 반드시 필요한 생명활동의 발현이다. 그래서 1주 단위의 근로시간 산정을 원칙으로 하고 있을 터다. 근로기준법이 법정근로시간을 1주 단위로 상한을 두는 이유가 있는데, 연장근로시간을 1주 단위가 아니라 최대 1년 단위까지 확장하겠다니. ‘주당 55시간 이상 근무’를 장시간 노동으로 보는 국제노동기구(ILO)와 세계보건기구(WHO)는 ‘주 55시간 이상 근무는 심각한 건강상의 위협’이라고 경고한다. 우리에겐 참으로 무색하다. 우리 헌법도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는데(32조3항),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로 갔는지.

한국과 최장 노동시간 챔피언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멕시코의 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자들에게 “사장이 못살게 굴면 사장을 죽여야지 왜 너희가 죽냐”고 했다는, 씁쓸한 온라인의 밈(유행)이 마냥 우습지만은 않다(멕시코는 살인율이, 한국은 자살률이 1위다). 이처럼 한국의 프로크루테스는 마치 침대 속 나그네를 위아래로 잡아당겨 키를 늘리듯이, 근로시간을 잡아당겨 늘리려 한다.

그런데 반대편에서는 목이나 다리를 잘라 근로시간을 줄이려는 프로크루테스가 있다. ‘소정’근로시간의 탈을 쓰고서 말이다. 근로기준법상 소정근로시간이 주당 15시간 미만인 이른바 ‘초단시간근로자’는 연차휴가수당 및 주휴수당을 지급받지 못하고(근기법 18조3항), 퇴직금 지급청구권도 보장되지 않는다(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4조). 시간급 임금을 받는 근로자의 경우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받는지 판단하는 기준도 소정근로시간에 의해 결정된다(소정근로시간이 짧을수록 위법의 범위가 줄어든다). 결국 사용자들은 연차휴가수당과 주휴수당 및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최저임금법 위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소정근로시간을 단축하려는 유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소정근로시간은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에 정한 근로시간”이라는데(근기법 2조 1항 8호), 갑을관계에서의 합의가 진정한 의사의 ‘합치’인 적이 있었던가. 주당 초단시간만 근로하는 것이 아님에도 초단시간 근로자로 둔갑돼 주휴일과 연차휴가, 퇴직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위장 초단시간근로자’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는 근로시간의 쟁취를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프로크루테스는, 다른 한편에서 이처럼 멀쩡한 근로시간의 머리와 다리를 잘라내어 소정근로시간의 감축을 통해 근로조건을 악화시킨다.

이 모든 부불(不佛)노동을 통해 잉여가치를 극대화하는 프로크루테스의 계략일지니. 실질적으로는 장시간 근로로, 형식적으로는 단시간근로로! 프로크루테스는 고인이 된 자신의 아들에게 친구를 보내주겠다고 톱으로 다리를 잘라 나그네를 저세상으로 보냈다는데, 우리의 영웅 테세우스는 “댁의 아드님은 이제 친구들보다 아버지가 더 그리울 것”이라면서 프로크루테스의 만행을 되갚았다. 일하는 사람이 일한 만큼 대접받을 수 있는 노동의 가치가 진심으로 존중되는 사회가 올 것이다, 반드시. 그날이 오면, 우리 모두 테세우스가 돼 프로크루테스를 단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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