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24조는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일을 포함한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당시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을 담은 독립 조항은 논쟁 끝에 삭제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어서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 조항 앞에 붙이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 즉 노동시간단축은 노동자들의 중요한 투쟁 요구였다. 그런데 19세기 미국과 영국의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을 외치며 총파업을 했는데, 2023년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요구하는 노동법 개악에 맞서 싸워야 할 처지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6일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근로시간제도 개편방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현재는 주 단위로 12시간의 연장근로가 허용돼 최장 52시간 노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의 정책은 연장근로 단위기간을 확대해 특정 기간에는 11시간 연속휴식시간을 주면 주 69시간 노동도 가능하고, 연속휴식 없이 1주 64시간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이다. 출퇴근 시간과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 모든 시간 일하라는 것이다. 주 40시간제가 정착돼 있고, 필요한 곳에서는 지금도 편법으로 장시간 노동이 이뤄지고 있으니 이 노동시간 개편방안을 현실화해도 당장은 큰 변화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가 점차 장시간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노동자들 사이의 노동시간 격차도 심각해질 것이다.
과로사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기준이 4주 평균 64시간 노동, 12주 평균 60시간 노동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누군가는 정말 죽음에 내몰린다. 죽도록 일하면 진짜로 죽는다. 굳이 이 기준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장시간 노동의 위험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느낀다. 장시간 심야노동은 더 위험한데 거기에 대해 내놓은 대책이라고는 ‘야간노동자에 대한 건강보호 가이드라인 보급’과 특수건강검진 등이다. 장시간 노동은 각종 질병의 원인이며, 안전사고 위험도 높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부가 이 정책을 발표하면서 내건 정책의 지향점이 ‘건강권 보호’와 ‘휴식권 보장’이란다. 구밀복검, 입에는 꿀을 바르고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
정부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를 도입해 장시간 노동을 한 만큼의 시간을 저축해 장기휴가로 쓰면 된다고 말한다. 노동자가 “나는 세 달 동안 장시간 노동을 하고, 그것을 모아서 제주도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하겠다”고 계획하면 불이익 없이 한 달 휴가를 쓸 수 있을까. 2020년 직장갑질119 조사에 의하면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40%에 달한다. 잔업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노동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결정한다. 휴가를 사용하는 것도 노동자의 요구보다 기업의 필요가 우선한다. 근로시간저축계좌는 노동자들이 저축만 하고 꺼내 쓸 수는 없는 계좌가 될 것이다.
노동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취미활동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에 묶인 삶에서 벗어나 노동자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면 노동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규칙적인 시간이 확보돼야 한다. 그래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고, 노동시간 변동이 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동시간은 유연한데, 노동시간 선택권이 기업에 있으면 노동자들은 늘 대기상태가 된다. 회사가 언제 잔업을 요구할지 알 수 없으므로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노동시간 결정을 노동자 개인이 아닌 근로자대표에게 맡기고, 노동조합이 아닌 부분근로자대표제를 도입하게 되면 노동자들은 더더욱 노동시간에 대한 결정 권한에서 멀어진다.
‘고용유연화’ 정책이 권리 없는 비정규 노동자를 확산한 것처럼 ‘노동시간 유연화’는 시간 주권이 없는 노동자를 양산할 것이다. 기준노동시간을 명시하지 않는 단기계약직이나 파견이 늘어나고, 계절노동이 확대될 것이다.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하기를 원하고, 그 때문에 임금은 더 오르지 않을 것이다. 고용불안정과 노동시간 불안정은 서로 나쁜 영향을 주고받는다. 정부는 ‘기업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일을 시키기 위해’ 장시간 노동과 노동시간 유연화를 추진한다. 반면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합리적인 노동시간 제한과 휴식, 그리고 여가를 필요로 한다. 2023년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바로 그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