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메이데이 전야제를 부산역에서 조촐하게 치렀다. 늘 빨간 머리띠를 매고 결사투쟁만 외치던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가 역 광장에 작은 무대를 세우고 이야기와 노래가 어우러진 토크쇼를 준비했다. 이야기꾼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노래는 우창수 가수가 맡았다. 역 광장을 오가는 시민에게 차분하게 노동자의 날을 알렸다.
다음날 아침 간단한 행장을 꾸려 단신 상경했다. 이렇게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갓 출범한 산별 언론노조에 노보 만들 신문쟁이가 필요해서 올라왔다. 혼자 사는 친구의 상계동 주공아파트 방 한 칸을 공짜로 얻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지만 그땐 인심이 후했다. 늘 그 친구가 고맙다. 콩나물 전철에서 1시간을 버텨야 시청역에 다다랐다. 모든 게 낯설었다. 전동차 문이 열리면 무조건 뛰는 서울 사람들이 무서웠다.
프레스센터 1802호 언론노조 사무실에선 청와대가 보였다. 정책실장을 하던 MBC 김상훈 선배는 “대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만큼 앳된 얼굴이었다. 집이 멀어 일주일에 2~3일은 사무실에서 밤새우거나 금속노조(당시 금속연맹) 서계동 숙소에서 잤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파견 나온 한진중공업 박성호 형이랑 같이.
그 잘생긴 박성호도 지난 연말 정년퇴직했다. 처음 상경할 때만 해도 이렇게 타향살이가 길어질 줄 몰랐다. 나는 기자와 노동조합을 오가며 보냈던 21년4개월의 짧지 않은 서울살이를 마감하고 지난해 여름 부산집으로 내려왔다.
가족과 떨어져 삼시세끼 혼자 해결하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났다. 체력 하나는 끝내줬는데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지난 여름 두 번의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몸 돌려 눕지도 못할 만큼 고통이 컸지만 살아야겠다는 투지가 불탔다. 두 딸과 아내는 돌아온 탕자를 반겼다. 나는 40년 피운 담배를 끊어 화답했다.
입원해 있을 땐 만사가 다 귀찮았다. 지난 가을 내 전화기는 자주 꺼져 있었다. 몇몇 지인들이 안부 전화를 했지만 대부분 받지 못했다. 지금은 다 회복해 등산도 다니고 일도 다시 시작했다. ‘보수의 도시’ 부산에서 기자질을 했기에, 권유받은 몇몇 일자리는 그간의 내 삶과 아주 달랐다. 제법 센 연봉에 잠시 흔들렸지만 20대 이후 살아온 삶을 부정하기 싫어서 조용히 고사했다. 그동안 나와 함께해 온 이들에게도 민폐를 끼치기 싫었다. 가족도 흔쾌히 동의했다. 무엇보다도 그간 내가 주되게 비판해 온 훼절한 기자 대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입장’은 늘 중요하다. 엊그제 정부가 이주노동자 정책을 큰 틀에서 바꾸는 ‘고용허가제 개편방안’을 발표하자, 각 신문마다 처해진 ‘입장’에 따라 정반대의 기사를 썼다. 정부가 중소기업의 심각한 인력난을 해소하려고 국내에 들어오는 이주노동자의 체류 기간을 현행 4년10개월(3년+1년+10개월)에서 10년 이상으로 대폭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보고 조선일보는 12월30일 ‘물류센터도 외국인 쓴다 … 가사도우미·베이비시터 허용도 추진’이란 3면 머리기사에서 일자리가 부족한 산업에 그린라이트가 켜졌다고 반겼다. 한국일보도 같은날 ‘숙련 외국인 근로자, 재입국 없이 최대 10년까지 일한다’는 8면 머리기사에서 구인난에 시달리는 산업계에 ‘숨통’이 트였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이날 3면에 ‘사업장 변경 제한 그대로 … 가족결합권 등 인권 개선 외면’이란 제목의 해설기사를 썼다. 기업주 입장에서 보도한 대부분의 언론과 달리 한겨레는 이주노동자 입장에서 기사를 썼다. 가족을 불러올 수도 없는데 고용기간만 늘려주면 무슨 소용이냐는 거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바라보는 풍경도 달라진다. 지난 20년 동안 해 온 대로 앞으로도 노동자 입장에서 한국 언론을 바라보겠노라 다짐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