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2007년 라희찬 감독이 만든 영화 <바르게 살자>는 블랙코미디다. 원칙주의에 꽉 막혀 융통성은 일도 없이 고지식한 교통순경(정재영)과 적당히 잘 비벼서 출세길을 달려온 경찰서장(손병호)의 대결 구도가 기본이다.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은 민심도 얻고 야심도 채우려고 은행강도 모의훈련을 제안한다. 교통순경 정재영이 강도로 발탁되면서 훈련이 꼬이기 시작한다.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고지식한 정재영이 열과 성을 다해 강도 연기에 몰입한 탓에 훈련은 실전보다 더 리얼하다. 급기야 특수기동대가 투입되고,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등 실전을 방불케 한다.

부산역 광장엔 ‘바르게 살자’라고 적힌 돌바위가 무슨 상징처럼 서 있다. ‘바르게 살자’라니. 참 많은 생각이 드는 문구다. 전국의 공원과 역 주변엔 이런 돌덩이가 서 있다. 니들이나 “바르게 살아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다.

전국에 이런 돌바위가 얼마나 많았으면 느와르 영화에 등장하는 양아치조차 이 문구를 패러디한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을 몸에 그리고 나올까. 영화는 ‘착하게’라는 맞춤법도 파괴한 채 ‘차카게’라며 일부러 틀린 문구를 집어넣었다. 마치 ‘니들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라는 야유로 들린다. 영화는 양아치의 몸을 통해 양아치보다 훨씬 못한 짓을 하고도 버젓이 잘 살아가는 소위 한국 사회 지도층에게 ‘제발 좀 차카게 살아라’고 당부한다.

이 돌바위는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바살협)가 전국에 설치했다. 바살협은 새마을운동중앙회·한국자유총연맹과 함께 3대 메이저 관변단체로 불린다. 자유총연맹은 50년대 반공연맹부터 시작했고 새마을운동중앙회도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니 오래됐다. 그러나 바살협은 1989년 4월 노태우 정권 때 출범했으니 이제 겨우 3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늦게 출발한 바살협은 ‘바르게 살자’ 돌바위 덕분에 빠르게 유명해졌다. 물론 이 돌바위도 국고보조금으로 세워졌다.

세 관변단체는 90년대까지 구청에 버젓이 사무실과 회의실까지 두고 있었다. 나는 기자 초년생 때 마감시간에 조용히 기사 쓸 공간을 찾아 헤매다가 구청 안에서 한가하기로 소문난 바살협 사무실을 집필장소로 즐겨 사용했다. 30명이 회의할 공간과 지부장 등 임원 4명쯤 앉아서 일할 사무공간엔 늘 직원 한 명만 근무했다. 그 직원도 종일 하는 일 없이 소설책만 읽었다. 그 직원에게 부탁해 텅빈 회의실을 마감장소로 활용했다. 거기 들어가면 기자실에서 2시간 걸려도 못 쓸 기사를 30분이면 뚝딱 마감했다. 너무 조용해 집중력이 최고였다.

김영삼 정권 때까지 정부가 민간단체에 주는 국고보조금의 대부분을 세 관변단체가 받아먹었다.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때부터 세 관변단체의 위상이 크게 떨어져 여러 시민단체로 보조금 지원이 확대됐다. 소위 시민단체가 세금을 받게 된 게 이즈음부터다. 그렇다고 세 관변단체에 주는 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시 이명박 정부 들어 세 관변단체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3대 관변단체는 이명박 정권 때 219억원을, 박근혜 정부 때 194억원을 지원받았다. 2000년대 초까지 보수언론조차 세 단체에 보조금이 집중되는 걸 비판하는 기사를 종종 썼다.

윤석열 정권이 갑자기 전 부처에서 민간단체 국가보조금 집행을 전면 감사하겠다고 나서자 헛웃음이 나왔다. 시민단체 보조금 비리가 지금 당장 터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보조금 부정수급 사례 24건을 제시했다. 심지어 매일경제는 ‘세금 투입 시민단체, 文정부 때 4503곳 급증’이라는 기사까지 썼다. 그럼 군사정권 때처럼 보조금(세금)을 세 관변단체가 독식해야 좋다는 말인가. 이렇게 팩트에 역사성을 지워 버리면, 기사는 괴물이 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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