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법인 노동을잇다 부설 노동해방역사연구소)
26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성별 임금격차 1위인 나라에서 “더 이상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운운했을 때 눈 밝은 사람들은 이미 알아챘으리라. 무슨 특대형 부조리라도 찾아낸 양, 대선 유세 기간 툭하면 “최저임금을 200만원으로 잡으면 150만원, 170만원 받고 일하겠다는 사람은 일을 못 해야 합니까?”라고 외쳤을 때 말이다. 조금 둔한 사람들도 알아챘을 것이다.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했을 때면, 제아무리 확증 편향에 빠졌던 사람일지라도 노동자들이 맞닥뜨릴 재앙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뚜껑을 열어 보니 역시나 상상 이상이다. 윤석열 정부는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2차 파업을 깨뜨리며 자신감이 충천한 모양이다. 저들 딴에는 드디어 성공 방정식을 찾아낸 걸까? 대중의 노조 혐오 정서를 십분 활용해 파업에 나선 노조를 무조건 귀족노조로 매도한다. 화물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 평균 시급(1만9천806원)에 못 미치는 시급(1만3천원)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일한다는 진짜 사정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보수 지지층을 결집시키면 그만이다. 이로써 정권 지지율이 오르면 자본가 양당의 하나인 더불어민주당은 동요할 수밖에 없고, 정국 주도권은 우리가 쥐게 된다!
여세를 몰아 어처구니없는 노동개악이 시도된다. 연장근로 한도 단위를 1주에서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개편해 주 80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을 합법화하겠단다. 19세기 영국 자본가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공장법은 너무 가혹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할 판이다. 영국 자본가들이 공장법 확대 시행을 반대했던 핵심 논리는 산업과 업무 특성상 노동시간의 유연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검사 시절 조직폭력배를 일망타진하던 기백으로 “노조 부패는 3대 부패”라며 기염을 토한다. 국가가 법적 근거도 없이 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사체인 노조의 재정·회계를 들여다보겠다고?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들먹이더니만, 노동 3권은 본질적으로 “국가공권력에 대해 근로자의 단결권 방어를 일차적인 목표”로 하는 자유권적 기본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헌법재판소 1998. 2. 27. 선고 94헌바13·26, 95헌바44 병합)은 똥 친 막대기 취급이다. 그렇게 노조 재정이 궁금하면 맘에 드는 노조에 직접 가입해 조합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유감없이 만끽하면 될 일을!
윤석열 정부의 최근 행보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자본주의가 맞닥뜨린 위기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드러낸다. 단일한 국제질서 속에서, 자본은 몸집을 불리고, 노동조합은 적당히 투쟁하면 때맞춰 임금이 오르던 좋은 시절의 자본주의는 끝났다. 물론 망해 가는 자본주의에서도 마지막까지 자본과 어깨동무를 하고 떡고물을 나눠 먹는 노동자 집단이 존재하겠지만 그 규모는 훨씬 줄어들고 사회적 고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노동조합 바깥의 노동자들, 불안정·여성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란 장밋빛 내일을 꿈꿀 수 없는 체제다. 부모 세대보다 자식 세대가 못 사는 게 당연해진 시대 아닌가.
마르크스가 예견한 장기적 이윤율 저하 경향이 실제로 관철된 현재,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천문학적인 양적완화로 위기를 유예했던 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다. 모두가 심대한 경제위기를 예고한다. 물론 자본에게도 활로는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예고하듯이, 제국주의 강대국 사이 패권 전쟁이 위기 해소의 한 방편이 될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는 세계 노동자계급이 오랜 투쟁으로 쟁취한 노동권을 분쇄하고 착취도를 강화하는 길이 있다. 이윤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오직 ‘야만’으로 회귀하는 선택지만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의 최근 행보를 일국적인 특수한 현상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인물난에 시달리던 자본가 양 당 중 하나가 술 좋아하는 검사 아재 하나를 아마추어 대통령으로 옹립해서 벌어진 사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차별과 혐오, 분할과 배제의 논리로 무장한 극우 정치 강화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미 국회의사당 난입 사태를 일으켰던 미국의 트럼프를 필두로, 브라질·프랑스·스웨덴 등에서 극우가 득세하더니 지난 10월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 이후 100년 만에 극우 총리가 탄생했다. 이주민이, 여성이, 성소수자가 이들의 희생양이다. 한국에서는 조직노동자 운동이 희생자 명단에 추가됐을 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조직노동자 운동 앞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놓여 있다.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며 자본에 맞서 결연히 싸울 것이냐, 아니면 굴복해 야만으로 회귀할 것이냐 하는 길이다. “사회의 모든 전반적 개조의 전야에는 사회과학 최후의 말은 항상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전투냐 죽음이냐 : 피에 얼룩진 투쟁이냐 멸망이냐. 문제는 그렇게 엄정하게 제기된다.”(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인용한 소설 내용)
어느 거대 산별노조의 선출직 지역본부장 한 명은 활동비를 받던 임기가 끝나자 노조에 퇴직금을 요구했단다. 노조에서 이를 거절하자 퇴직금 지급 청구소송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이런 한가한 관료들이 아니라 투쟁의 정신으로 무장한 진짜배기 노동자 투사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노동자들에게는 분명히 세상을 바로잡을 거대한 잠재력이 있다. 누가 뭐래도 노동이 없으면 “법과 원칙”을 들먹일 세상도 없는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