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

지난달 서울교통공사 역무원이 서울지하철 신당역에서 같은 회사 동료의 스토킹 범죄로 살해당한 현장에서 누군가 외쳤다. “여성이 ‘일하다’ 죽었다”고.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직후 피해자를 추모하는 침묵시위가 이어졌고, 민주노총과 여성노동자들은 “젠더폭력은 산업재해”라는 손팻말을 들고 살인 현장인 지하철역 화장실 앞에 모였다.

6년 전 강남역 화장실에서도 여성이 살해당했다. 그때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했다면, 이번 사건은 업무 중에 발생했다. 사건이 일어난 ‘신당역 화장실’은 피해자의 ‘업무’ 공간에 속했고, 가해자는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가해자는 서울교통공사라는 ‘직장’에서 수개월에 걸쳐 피해자를 스토킹하고 협박했고, 끝내 살해한 것이다.

직장 동료의 고의 가해행위
“업무에 내재된 위험, 현실화한 것”

일터에서 발생하는 젠더폭력 피해는 이미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하고 있다. 젠더폭력을 산업재해로 보상하는 이유는 ‘업무에 내재된 위험이 현실화했다’는 인과관계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 8월 근로복지공단이 직장내 성추행 가해자를 상대로 피해자에게 지급한 산재보험금 구상권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2년여에 걸쳐 직장내 성추행과 성희롱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2017년 극단적 선택을 한 것과 관련해 공단은 산재로 인정하고 유족에게 1억5천만원을 지급한 후 성추행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낸 사건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은 피해자를 대신해 공단이 제3자에게 손해배상 청구권을 대신 행사할 수 있다. 동일한 사업주에게 고용된 동료 노동자는 법상 ‘제3자’에서 제외한다는 게 기존 판례다. 1·2심은 공단 손을 들어줬지만 대법원은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성추행처럼 명백한 고의라고 해도 같은 사업주에게 고용된 직장 동료는 제3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보도자료에서 “동료 직원의 고의로 인한 가해행위 역시 사업장의 기계기구 등의 위험같이 사업장이 갖는 하나의 위험에 해당한다”며 “그런 위험이 현실화해 발생한 업무상 재해에 근로복지공단이 궁극적으로 보상책임을 지는 것은 산재보험의 사회보험 성격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성폭력같이 상급자나 직장 동료에 의한 가해행위로 다른 노동자가 피해를 겪는 것을 개인 범죄로만 보지 않는다. 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업무상 질병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설비나 시설뿐 아니라 사람인 경우도 많다”며 “일터 내 인간관계 또는 직무에 내재하거나 통상 수반하는 위험의 현실화로서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있으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성폭력 사망재해 지난해 2건
해마다 늘어나는 젠더폭력 산재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직장내 성폭력으로 인한 산재신청’은 2017년 11건에서 지난해 53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6월까지 벌써 41건의 성폭력 산재신청이 접수됐다. 성폭력 산재 승인율은 평균 90.1%(2017~2022년 6월)로 평균 50%대인 다른 업무상 질병 산재 승인율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높다.

공단이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성폭력 산재 10건 중 9건은 재해자가 여성이다. 5년간 산재로 승인된 173건(2017년~2022년 8월) 가운데 남성이 재해자인 사건은 13.2%(23건)였다. 지난해 승인된 성폭력 사망재해 2건은 남성과 여성 각 1건씩 발생했다.

지난해 산재로 인정된 세아베스틸 군산공장 성폭력 사망재해 사건은 ‘방치된 위험’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2018년 11월 자신의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30대 남성노동자 A씨는 직장내 성추행과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회사는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해 직장 상사가 A씨의 옷을 벗겨 문신 검사를 하거나 단체 나체 사진을 찍어 돌려보고, 상습적으로 성기를 만지는 등 추행이 벌어진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세아베스틸은 가해자 2명에게 정직 2~3개월 징계를 한 뒤 다시 업무에 복귀시켰다.

올해 초 유족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제 동생을 위해 철저한 사건 조사가 필요합니다’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글을 쓴 이는 숨진 남성의 형으로, 동생의 사망 후 동생의 휴대전화와 PC, 직장 동료의 추가 증언 등 여러 자료를 취합해 공단에 산재신청을 했다고 전했다. 공단은 지난해 1월 A씨의 죽음이 성폭력과 괴롭힘으로 인한 산업재해가 맞다고 인정했지만 사측은 ‘개인 간의 문제’로 보고 작업환경 개선 등의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후 유족이 A씨의 유서를 언론에 공개해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세아베스틸 대표이사는 공개 사과하고 사퇴했다.

산재예방 감독 없는 ‘방치된 위험’
요양 후 복귀해도 위험 제거 안 되면 질병 악화

남도학숙 성희롱 피해자 B씨는 다음달 초 산재 재요양 기간 만료를 앞두고 있다. 2014년 입사한 B씨는 직장 상사의 신체 접촉과 술시중 요구를 고발한 뒤 가해자를 비롯한 상급자들에게 직장내 따돌림과 괴롭힘이 시작돼 여러 차례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2015년 10월부터 B씨는 별실로 보내져 6개월 이상 근무하기도 했다. 공단은 2017년 B씨의 우울병 에피소드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산재로 인정했다.

2020년 1월 요양기간이 끝나고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업무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도학숙은 B씨를 성희롱이 발생한 장소이면서 괴롭힘 가해자들과 함께 일하는 부서로 복직시키고, 정신질병에 대한 병가 불허 규정을 신설해 복직한 피해자가 정신과 통원치료를 위해 신청한 병가를 불허하기까지 했다. B씨의 질환은 악화해 주요우울장애와 공황장애 진단이 내려졌다. 병가 신청마저 거절되자 지난해 10월 B씨는 공단에 산재 재요양을 요청해 승인받았다. 재요양은 과거 최초 산재 요양을 인정받은 질병이 재발하거나 상태가 악화된 경우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라 다시 산재 요양을 인정하는 제도다.

1년간의 재요양 기간이 끝나가지만 B씨의 업무환경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B씨는 “회사가 악의적이고 조직적으로 괴롭히고 병가마저 사용할 수 없도록 해 치료를 막는다”며 “산재가 없었다면 해고되거나 극단적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남도학숙은 성희롱 피해를 입은 B씨에게 300만원의 위자료를 주라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지난달 21일 7년 만에 공식 사과했으면서도 2차 가해 부분은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았다며 B씨에게 소송비용을 청구했다. 지난 20일 광주시에 대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논란이 됐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앞에서는 사과하고 뒤에서는 소송 비용을 청구하는 것은 보복성 조치”라고 비판했다. 남도학숙 이사장인 강기정 광주시장은 “남도학숙 성희롱 사건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라며 “후속대책이나 재발방지 대책 등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엄격히 하겠다”고 답변했다.

사후적 보상은 ‘OK’ 사전적 예방체계는 ‘미흡’
작업환경 같아도 위험 빈도·크기 달라

직장내 성적 괴롭힘과 폭력은 산재보험으로 보상하지만,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산재예방 영역에서는 주요 의제로 다뤄지고 있지 않다. 사후적인 산재보상은 되지만 산업안전체계 안에서 성적 괴롭힘과 폭력을 위험으로 간주하고 사업장 안에서 예방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한 실정이다.

성적 괴롭힘·폭력 같은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해치는 성별화된 위험요인은 작업환경에서 중요한 변수로 고려돼야 하는데도 산재예방을 위한 표준화된 내용에는 빠져 있다. 산업안전 관련 법률이 ‘굴뚝산업’ 중심의 작업환경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여수진 공인노무사(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는 “감정노동자보호법이나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이 생기면서 인격권 침해를 산업안전의 영역으로 다루고 그 의미가 넓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스토킹처럼 성별화된 위험에 대해서는 사회적 인식이 아직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성적 괴롭힘과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작업환경의 위험요인이 성별화돼 있다는 점부터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같은 병원에서 일해도 남성보다 여성이 폭언·폭행·성폭력 위험에 노출될 위험이 크고, 여성이 대다수인 요양보호사나 방문점검원 같은 경우 방문노동이라는 업무 특성상 폭력과 괴롭힘 같은 위협에 내몰리기 쉽다. 최민 직업환경의학과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같은 화학물질을 다뤄도 임신·출산기에 노출됐을 때 더 위험해질 수 있는 것처럼 성별, 성적 지향에 따라 같은 작업환경에서도 위험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 성희롱 포함 폭력 ‘위험’ 명시하고 취약직종 분류
영국 ‘단독노동’ 위험요인으로 간주해 보호지침 마련

이미 외국에서는 젠더폭력을 포함한 일터 내 폭력과 괴롭힘을 산업안전보건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19년 6월 ‘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190호)을 채택했다. 직장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괴롭힘을 철폐하고 예방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보호와 예방’을 위해 노사단체가 협의해 폭력과 괴롭힘에 더 많이 노출되는 직업과 근무 방식 등을 파악하고, 노동자들과 노동자 대표들이 참여해 폭력과 괴롭힘 위험요소를 파악해 평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독일의 경우 일터 내 성희롱에 노출되기 쉬운 직업·직무를 분류하고 노동안전 틀에서 보호한다. 노동보호와 안전기술을 위한 주 정부위원회(LASI)가 발표한 ‘일터에서 정신적 부담 : 감독과 상담을 위한 해설과 지침’(LV 52)에는 작업환경에서 발생하는 위험의 특성과 작업예시를 분류했다. 여기에 언어적·신체적 성희롱을 포함한 ‘폭력·공격·트라우마를 야기하는 사건’이 들어가 있는데 성희롱에 취약한 직업·직무로 서비스 직원 등을 명시했다. 고객·환자 등 타인의 폭력에 따른 위협에 노출되는 경우 등을 말하는 ‘과도한 감정사용’의 경우엔 간호인력·서비스업 종사자가 언급됐다.

영국은 산업안전보건정책상 일터에서 혼자 근무하는 ‘단독노동’을 일종의 위험요인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지침을 두고 있다. 국가건강서비스(NHS)에서 단독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돌봄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단독작업자 보호 가이드(Lone worker protection guide)’를 만들었고, NHS 위탁기관들은 관련 사내 가이드라인을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정 방문 전에 위험평가를 통해 환자가 고위험 또는 잠재적 위험이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평가항목도 세분화돼 있다.

강은희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재가방문 요양보호사는 대부분 50~60대 여성인데 수급자에게 폭력·괴롭힘 피해를 당해도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며 “혼자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경우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큰 만큼 영국처럼 재가방문 이전에 위험도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방식으로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 여성 참여 보장해야
‘모두의 안전한 일터’로

사업장 안전보건 관련 심의·의결기구인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여성의 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산업안전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 주체로 참여함으로써 ‘여성문제’를 넘어 사업장 ‘안전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양성평등정책포럼 ‘신당역 사건을 통해 본 스토킹 방지 법·정책의 공백과 개선과제’ 토론회에서 “직장내 폭력과 괴롭힘을 산업안전보건 이슈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히 부족한데 산업안전보건위의 여성 대표성이 강화될수록 폭력 문제에 대한 기업 내 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민주노총이 2019년 가맹조직을 대상으로 여성 대표성을 조사한 결과 여성 교섭위원 비율이 3분의 1 미만인 경우가 절반 이상인 54.8%였다. 응답 조직의 38.1%은 여성 교섭위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성별을 강조할수록 ‘여성=취약한 존재’라는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여성노동자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여성에 대한 배제나 또 다른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배 대표는 “노동안전 측면에서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노인 모두 취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산업안전보건 영역에서 젠더적 시각을 반영했을 때 여성만이 아닌 모두가 안전한 일터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현재의 작업표준이 누구에게 맞춰져 있는지를 드러냈을 때 비로소 여성과 남성 모두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민 전문의는 “작업속도를 예로 들면 건강한 남성도 근골격계질환에 시달리게 될 정도로 표준속도가 맞춰져 있는데 이를 조금 낮추면 근육이 원래 약하거나 고령인 노동자 등도 조금 더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고 원래 건강하던 사람도 병이 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된다”며 “여성이 안전한 일터는 모두에게 안전한 일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노동+젠더 취재팀 : 김미영·어고은·강예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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