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제목을 쓰고 보니 좀 거창하다. 노동자가 법정의 주인이라거나, 노동자를 위한 법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고 말았다.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일단 시작하자고 대충 썼다.

지난 25일 기아차 3차 통상임금 소송사건 재판이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562호 법정에서 열린 재판이었다. 아무 소감 없이 흘려보낼 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쓰자고 달려들었더니 제목부터 쉽지가 않다. 당신은 ‘이미 다 정리된 사건이 아니냐’며 내 이런 짓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2011년부터 시작해서 2019년 2월 서울고등법원 판결 뒤에 노사합의해서 소 취하하고 부제소 동의서까지 제출해서 정리됐고, 그때 노사합의를 수용하지 않고 소 취하하지 않았던 조합원들은 대법원 확정판결로 승소했으니 ‘뭘 더 할 것이 있냐’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 후속 사건이라고 해 봐야 기간만 달리해서 청구한 것이니 대법원 판결로 정리된 선행사건 기준에 따라 청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냐’면서.

하지만 아니다. 법정은 치열했다. 원·피고 대리인들이 PPT 자료까지 준비해서 1시간을 변론했을 정도로 법정은 뜨거웠다. 90%에 이르는 대다수는 노사합의에 따라 정리됐어도 나머지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임금권리를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다며 소송대리인을 통해서 청구금액을 산정해 청구하고 있고, 사측은 선행사건의 기준을 넘은 청구가 포함돼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제소합의에 반하고 임금채권의 소멸시효 3년를 도과한 것이라고 기각되고 각하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의 쟁점과 이를 둘러싼 공방으로 보자면 선행사건에 버금갈 정도라서 오늘도 통상임금을 둘러싼 기아 노동자의 법정은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2. 사실 우리는 법정에서 PPT를 할 생각이 없었다. 선행사건에 관한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있으니 대단하게 변론할 계획은 없었다. 더구나 이미 다른 재판부에서 선고한 판결까지 있었다. 우리가 나서서 괜히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사건인 것처럼 심각하게 재판을 끌고 가는 변론 방법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바란 건 아니었지만, 피고 사측 대리인이 재판부에 요청해서 하게 됐으니 그저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일, 우리도 하게 됐다.

이날 사측 대리인은 부제소합의에 집중해서 PPT 변론을 했다. 현재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원고 노동자들은 사용자인 피고 기아와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부제소합의를 했고, 그럼에도 피고를 상대로 청구해서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이니 구체적인 청구에 관한 원고들의 주장을 들어볼 것 없이 각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제소합의 주장을 위해서 피고가 펼쳐놓은 PPT 화면에는, 2011년 10월 2만7천500여명의 기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주도로 소송을 제기했던 때부터 그 사건에 관해서 2019년 2월 서울고법에서 판결이 선고되고서 3월 노동조합이 사측과 특별합의할 때까지 기아자동차 통상임금소송과 대표소송 등 노사합의의 경과가 요약, 정리돼 있었다.

사측 대리인이 부제소합의의 근거 자료로 중요하게 내세운 것은 2015년 통지서였다. 당시 진행하고 있던 대표소송의 소송대리인들이 사측에 보낸 것이다. 이 당시에는 2011년 조합원들이 집단적으로 소송을 제기한 뒤 다시 3년간의 청구를 위해 대표소송을 제기해서 진행 중인 상태였다. 현대차 노사가 통상임금 소송을 대표소송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자 기아 노사도 2011년 11월분부터 3년간 임금 청구는 대표소송을 진행해서 그 대법원 확정판결 결과를 전체 직원에게 적용해 주기로 합의했다. 위 2011년 집단적으로 청구한 소송이 1차 통상임금 소송이고, 이 대표소송은 2차 통상임금 소송이다. 1차 통상임금 소송과 달리 대표소송인 2차 소송에서는 나는 소송대리인이 아니었다. 당시 대표소송을 둘러싸고 노사 간에 있었던 논란은 들어서 파악하고 있다. 대표소송 합의를 했지만, 노조가 대표자를 선정해 제기한 소송을 사측이 대표소송으로 인정해 주느냐부터가 문제였다. 당시 현대차 노사 간에도 같은 논란이 있었다. 노조의 거듭된 요청에서 사측은 대표자 선정에 관한 합의를 해 주지 않고 지연시키자 노조가 대표자를 선정해서 소송을 제기하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노조는 사측이 대표소송으로 인정하지 않고서 장차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와도 전체 조합원들에게 적용해 주지 않겠다고 나올 걸 우려했다. 실제로 당시 사측은 공공연히 대표소송을 부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표소송 합의 이후에 현대차·기아차 노사 간 통상임금에 관한 협상의 주된 내용은 대표소송에 관한 것이었다.

통지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대표소송을 대리하고 있던 소송대리인들이 작성해서 사측에 보낸 것이었다. 당연히 대표소송으로 인정해서 합의된 대로 사측에 이행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통지서에서는 사측에 이런 요구를 하면서 대표소송 합의의 정신에 따라 조합원들은 개별적으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사측은 바로 이걸 가지고 부제소합의의 유력한 근거로 내세우고서 PPT 변론을 통해서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 노동자권리를 확인하는 법정에서 사용자는 노동자들의 선의를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측 대리인은 부제소합의 주장 말고도 소멸시효 항변도 하고 있다. 이번에 서울중앙지법에서 PPT 변론을 한 것은 2차 통상임금 소송 사건인 대표소송의 청구 기간 이후 기간에 대해서 청구한 사건이었다. 조합원 약 2만5천명이 집단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대표소송을 둘러싼 논란에 다시 1차 소송 방식으로 돌아간 것이다. 바로 3차 통상임금 소송 사건이다. 2019년 3월 노사합의를 하고서 대표소송이 취하되자 이 대표소송 청구기간까지도 청구취지 확장을 통해서 추가로 청구하게 됐다. 그랬더니 피고 사측은 3년의 임금채권 소멸시효가 도과돼 소멸했다며 재판부에 각하해 달라 하고 있고, PPT 변론을 통해서 거듭 주장했다.

3. 사측 대리인에 이어서 PPT 변론에 나섰다. PPT 화면을 띄워 놓고 차례로 피고 주장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변론했다. 당연히 부제소합의 주장과 소멸시효 항변에 관한 피고 주장을 반박하는 것에 집중했다. 부재소합의는 재판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이라서 그 재판청구권한을 가진 자의 명확한 의사도 없이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당시 원고를 포함한 조합원들이 그러한 의사를 표시했던 것도 아니다. 대표소송 소송대리인들의 주된 통지서 내용과 취지는 사측에 대표소송 합의 이행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사측에 이를 인정하라고 강조하고, 이를 전제로 개별적으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대법원 확정판결 결과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재판청구권 행사를 포기할 이유도 의지도 없었다. 그런데 2019년 2월 서울고법에서 1차 통상임금 소송 사건과 함께 2차 통상임금 소송 사건인 대표소송사건도 1심 서울중앙지법 판결에 이어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사실상 승소판결을 받았음에도 노사합의로 대표소송이 취하되면서 졸지에 대표소송의 대법원 확정판결의 결과를 적용받을 수가 없게 돼 버렸다. 그래서 대표소송 기간의 임금을 청구하게 된 것인데, 이를 두고서 개별적으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하고서 청구한 것이라며 부제소합의 운운하는 것이다. 이러한 피고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이 나라 법정에서는 노동자권리를 위한 노동자의 재판청구권은 너무 쉽게 포기된다.

이날 재판을 마치면서, 대표소송의 소송대리인으로서 통지서를 작성해 사측에 보냈던 변호사에게 당시 경위 등을 자세히 밝힌 참고서면을 작성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나는 법정을 나왔다.

아, 이날 PPT 변론에서 나는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의 부당성에 관해서 자세히 밝혔다. 피고가 노조와 대표소송에 관해 합의해서 그 합의에 따라 대표소송의 대법원 확정판결의 결과를 동일하게 적용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소송하지 않고 기다렸던 것인데, 피고 사측이 소멸시효 기간 도과 운운하면서 항변하는 것은 권리 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 노조와 대표소송에 관한 합의를 하고, 대표소송을 취하하는 특별합의를 한 것이 피고 사측이라는 점에서 너무도 명백하다. 노동자권리를 확인하기 위한 법정에서는 노동자의 신뢰를 저버리고서 하는 사용자의 항변은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4. 원·피고 대리인들의 PPT 변론이 끝난 뒤 재판장은 물었다. “노사가 합의해서 조합원투표로 가결됐는데도 소송해서 합의와 달리 판결이 나오면 노동조합이 결정한 것인데 문제 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원고 노동자들을 대리하는 나는 “문제 되지 않는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조합원에게 귀속된 권리라고 노조가 노사합의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굳이 덧붙여 말하지 않았다. 윤아무개 조합원이 재판장의 진술 허락을 얻어 원고 자격으로 방청석에서 일어났다. 노사합의 수준이 실제 받아야 할 금액의 절반에 불과했고, 당시 조합원투표에는 소송에 참여하지 않는 조합원들까지 투표했으며, 그럼에도 50%를 겨우 넘겨 가결됐고, 노동조합도 개별 소송을 반대하지 않고 지원해 왔다고 말했다. 재판장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PPT를 통해 원·피고 대리인들이 변론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 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노동자에게 법정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다. “노동자를 위한 법정은 아니다. 노동자권리를 확인하기 위한 재판일 뿐.” 그 법정에서 오늘도 노동자들 대리인으로서 나는 노동자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