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언론이 앞서 보도한 기사를 뒤늦게 보도하는 건 맥 빠진다. 그래서 이런 기사를 물먹은 기사라 한다.
지난달 22일 조선일보는 7개월 전 상대방 허락 없이 성관계 사진을 찍고 도중에 다른 사람과 통화하면서 이 상황을 중계해 논란을 일으켜 퇴직했던 유기홍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9급 비서관이 7개월 만에 8급으로 급수를 올려 복직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12월21일 ‘여친과 성관계 영상 찍고, 지인에 전화 중계… 與의원 9급 비서 사과’란 제목으로 이 비서관의 비리를 첫 보도 했다.
한겨레는 지난해 12월과 지난달에 걸쳐 조선일보에 두 번씩이나 물먹은 기사를 지난달 23일 8면에 ‘불법촬영·중계 민주당 9급 비서관 면직 7개월 만에 8급으로 승진 복직’이란 제목으로 따라 보도했다.
달라진 팩트는 조선일보 보도 직후 유 의원실이 해당 비서를 즉시 면직했다는 것밖에 없었다. 유 의원실은 한겨레에 “당사자가 먼저 원해 면직 처리했다. 저희가 없는 자리를 만든 게 아니라 때마침 자리가 비어서 채용했다”고 해명했다.
유 의원은 서울대 운동권 출신으로 민청련 김근태 대표 밑에서 사무국장을 지내다가 민청련 의장을 맡았다. 1997년 국민승리21의 권영길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도 대변인을 맡았다.
유 의원은 586세대도 아니어서 구설수에 휘말리지도 않아 숨은 실력자라는 평을 받아왔다. 이번 국회 원 구성에서도 교육위원장을 맡을 만큼 중진인데 비서 한 명 때문에 도마에 올랐다.
한겨레의 용기가 더 대단하다. 여느 언론 같으면 두 번씩 물먹은 기사라 거들떠보지도 않을 법한데 뒤늦게나마 추가 취재해 지면에 보도했다. 독자는 누가 특종을 했고, 누가 물 먹었는지 잘 모른다. 언론사는 오직 독자 입장에서 보도할 가치가 있냐 없냐만 생각하면 된다. 한겨레가 민주당을 특별히 싫어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보도가 민주당엔 약이 된다.
한겨레는 같은 날 1~4면 모두를 털어 ‘세종대 40년 잔혹사’를 썼다. 한겨레는 10년 넘게 탄압에 맞서 싸우는 세종호텔노조와 40여년 동안 세종대 민주화에 매달리는 박춘노 세종대 정상화 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세종대를 둘러싼 싸움은 너무 지난해서 이제는 대부분의 언론이 눈길조차 두지 않는 사안인데도 한겨레는 토요일 자 4개 지면을 할애해 길고 험난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늘 톡톡 튀는 새로운 아이템만 찾는 언론의 생리에 반하는 의제인데 한겨레는 외면하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돼 낡은 의제라도 아직 해결되지 않고 현재진행형이라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언론의 사명을 제대로 지켰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25년 전인 1995년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인터뷰하려고 남편 찰스 왕세자와 유모의 불륜과 낙태 소문까지 지어낸 사실 앞에 공식 사과하고 배상까지 결정했다. 국민의 알권리를 지키기 위해선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라도 귀 기울이고 취재 과정에 잘못이 있으면 그것이 25년 전 이야기일지라도 사과하고 배상하는 게 언론 윤리다.
여러 한국 언론이 아베 총리의 죽음 뒤에 숨어있는 통일교와 자민당의 관계에 침묵했지만 경향신문은 꾸준히 ‘통일교의 헌납 방식과 일본 정치권과 유착’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에선 아사히와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가 아베 사망 이후 두 진영의 유착 고리를 심층 취재해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언론은 이 소식을 외면한다. ‘국익을 위해서’라는 변명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 말은 논리도 안 맞고 사실도 아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