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싱 타는 여자들>은 청계피복노조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지난 1월에 개봉했다.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작품상 후보작에 올랐고, 들꽃영화상에서 대상을 받은 수작이다.
영화 제작은 2018년 김정영 감독이 서울에 있는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디지털영상 아카이빙 작업을 위해 봉제노동자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진행한 것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이혁래 감독이 합류하면서, 실제 사진과 글 등 다양한 사료가 곁들여지면서 만듦새가 풍성해졌다. 영화에 쓰인 사료들은 각자 보관하고 있던 개인 자료 외에 전태일기념관과 민주화기념사업회의 소장 자료들이 쓰였다.
1. 중년이 돼 다시 만난 평화시장의 여성노동자들
1970년대 평화시장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갓 졸업한 뒤, 공장에 취직해 미싱 일을 배우던 ‘시다’들이 있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지만, 배움에 목이 마른 소녀들은 청계피복노조가 마련한 노동교실에 모여 배움과 친교를 나눴다.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그 뜻을 이어받은 어머니 이소선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노조다.
영화는 3명의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당시를 기억하는 관계자 11명의 인터뷰와 자료를 곁들여 노동과 투쟁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첫 장면부터 파란 하늘이 보이는 벌판에 미싱 3대를 놓고, 이제 60대가 된 이숙희·신순애·임미경 셋이 만나 웃으며 미싱을 돌린다. 시적인 영상미가 물씬 풍기는 이 오프닝은 영화 포스터로도 활용됐다. 감독은 인터뷰한 화면을 정교하게 편집하고, 카메라 움직임과 음악을 활용해 감정의 완급을 조절한다.
또한 영화는 노석미 화가의 미술 작업과 결합해, 여성노동자들의 젊은 시절 얼굴을 복원해 낸다. 옛날 사진을 큰 화면에 띄워 놓고 인터뷰한다. 당사자들이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면서 기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의미 있는 장소로 가서 묻어 둔 기억 저편의 자신을 만나도록 한다. 마지막 장소에 이르러 ‘평화의 나무 합창단’이 쏟아내는 합창을 듣노라면, 출연자는 물론 관객 역시 상처가 치유되고 앙금이 정화되는 뭉클함을 느낄 수 있다.
2. 아무도 기념하지 않은 9·9 투쟁
영화는 1977년 9월9일 투쟁을 정점에 두고 점진적으로 이야기를 쌓아 간다. 노동운동사에서 9·9 투쟁은 아무도 기념하지 않는 작은 투쟁이다. 여성노동자들이 극렬하게 저항했으나 승리하지 못했기에, 가장 큰 내상을 입은 사건이기도 하다.
1977년 7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장기표가 구속되고 재판이 시작됐다. 당시 이소선 여사가 법정에서 항의를 했는데, 법정모독죄라는 죄목으로 집에 있던 이소선 여사가 갑자기 연행됐다. 그 후 노동교실도 임대해지를 통보받았다. 평소 이소선 여사를 ‘어머니’라 부르고, 노동교실을 소중한 터전으로 느끼며 살았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이소선을 석방하고 노동교실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결사 항쟁에 나섰다.
이들은 노조 지도부와 조율 없이 기습적으로 노동교실 입구를 봉쇄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경찰과 대치한 상태에서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돼야 해”라고 말하며, 창문 밖으로 투신하겠다고 창문에 매달렸다. 깨진 유리 조각으로 몸을 그어 피를 흘리고, 석유를 뿌려 불을 붙였다. 극한의 대치가 이어지자 노조 지도부가 경찰과 협상에 나섰다. 노동교실 계약기간을 보장한다는 것과, 시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구두약속을 받고 해산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들은 연행·구속됐다.
노동교실을 지키고 싶었던 어린 여공들의 절박한 투쟁이었건만, 사법 당국은 이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왜 하필 (북한의 건국기념일과 같은) 9월9일이냐?” “왜 이소선을 어머니로 부르냐? (북한은 김일성을 수령 아버지라고 부르는데)”는 심문이 반복됐다. 유치장에서도 대학생들과 달리 면회가 일체 금지되고, 갈아입을 속옷조차 반입이 불허되는 가혹한 차별에 시달렸다. 심지어 당시 임미경은 만 15세가 되지 않아 교도소에 갈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주민등록번호까지 조작해 교도소로 보내졌다. 심각한 인권유린이지만, 임미경의 인터뷰에는 분노가 아닌 연민이 담겨 있다. 자신을 배후라고 지목했던 마음 약한 동료를 이해하기까지 했다. 이 어린 소녀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어리둥절해 했다던 당시 경찰과 교도관, 심지어 큰 권한이 있는 줄 알았지만 자신의 양심에 따라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어 보였던 판사의 심정도 이해가 되더라는 그의 아량에 숙연함이 느껴진다.
3. 기억을 복원하고 치유하는 영화
영화는 당시 사건의 진실을 탐색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에 주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투쟁에 주체적으로 참여한 당사자들이 무엇을 느꼈고,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당시 극한의 투쟁에 나서고, 구금됐던 이들은 현재 평범한 중년의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은 자식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담담히 말한다. 한때 가족보다 더 친하게 지냈으나 소식을 잊고 살게 된 동지들을 새로 만나는 감회가 녹록지 않다. 너무 상처가 큰 투쟁이었기에 서로 말하지 않게 된 면도 있다.
영화는 당시의 자신을 마주하고 혼란스러운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심리치유 효과를 지닌다. 노동교실을 처음 찾으면서 기뻤던 일, 여름 수련회를 가서 즐거웠던 추억, ‘그날’의 절박하고 무서웠던 감정들, 이후 끌려가 조사를 받고 감옥에서 당했던 치욕적인 순간들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임미경은 16살 자신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그래도 잘살았어. 지금도 잘살고 있고”라고 말한다. 투쟁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시켜 나간 것이다.
한국노동운동사를 남성 중심의 서사로 이해하는 사람들 중에는 1970년 전태일 분신에서 곧바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줄 아는 자들이 많다. 이는 여성노동자들의 작고 실패한 투쟁들을 무시하는 처사다. 전태일의 누이인 전순옥이 쓴 책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에는 “1980년대 중반 남성노동자들이 스스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십 년 넘게 정의를 위해 투쟁해 온 여성노동자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조지 오글 목사의 말이 나온다.
영화를 촬영할 때, 출연진을 포함한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55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폭력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그 당시 직원 명부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조합원이었음에도 그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제작진의 아카이빙 작업이 증거가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 결과 55명 중 54명이 피해를 인정받았다는 후문이다.
<미싱 타는 여자들>은 영화가 기억을 복원하고 치유를 이끌어 낸 아름다운 사례로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