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엔비디아·TSMC·삼성 등 ‘테크’ 기업들이 어마어마한 시가총액을 자랑하듯이 반도체 없는 자본주의 산업을 생각하기 어렵다. 인천·광주에 공장을 둔 앰코테크롤로지코리아는 TSMC나 삼성만큼 유명한 기업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반도체 패키징(조립)회사다. 모회사인 앰코테크놀로지는 아남반도체로 시작해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으로 전 세계에 3만명의 직원이 있고, 자회사인 앰코의 연매출도 2조원이 넘는다.
내가 이 회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수년 전에 직업성 암 산업재해 사건을 담당하면서였다. 앰코에서 일하다 직업성 암이 발병한 노동자들의 산재 사건을 진행하면서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이른바 ‘첨단’산업으로 불리는 반도체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각종 유해물질에 너무 쉽게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학약품을 상시적으로 사용하고 장비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하얀 방진복의 이미지를 빼면 ‘굴뚝산업’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담당했던 사건을 포함해 앰코 노동자들의 직업성 암 산재 사건들이 대부분 공단에서 승인됐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을 포함해 운동진영이 노동자 건강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투쟁해 온 성과이자, 사업장에 조직돼 있던 금속노조 지회가 업무환경에 관한 자료를 확보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회사는 지회의 노안활동을 문제 삼아 간부들에게 중징계를 내리는 것으로 보복했다. 앰코 직업성 암 산재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인 건도 있고, 이후에도 나올 수 있으니 ‘첨단’산업에서도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한 사업장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광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면서 내가 처음으로 진행한 상담도 앰코 사건이었다. 이번에는 지회 조합원들이 회사의 성실한 교섭을 촉구하고 사장 면담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가 조합원들에게 중징계를 내린 것이다. 다시 한번 첨단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고민하게 됐다.
아남반도체로 출발한 회사가 지금과 같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해물질 노출, 장기간의 심야노동을 수반한 교대제, 낮은 임금을 수십년간 감수해 온 노동자들의 희생을 빼놓을 수 없다. 회사는 막대한 매출과 이익을 실현하면서 규모를 불려 왔지만 정작 글로벌 첨단기업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거의 없었다. 회사는 빈번히 임금을 동결했고, 최저임금 위반을 피하기 위해 상여금 지급주기를 변경하는 꼼수를 썼다. 회사가 알아서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지회 소식지에 실린 문구대로, 노동자의 희생으로 회사는 발전할 수 있었고, 그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앰코는 없었을 것이다. 뭉친 만큼 누릴 수 있다!
지회 조합원들은 사업장 규모에 비해 소수지만 용케도 기죽지 않고 꾸준히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투쟁을 조직하면서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 회사는 교섭해태, 지회 농성장 침탈, 조합원 징계, 노조탈퇴 회유 등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지회도 이에 굴하지 않고 파업, 본사 항의방문, 사장 면담 요구, 농성, 법률투쟁 등 적극적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회사의 노조탈퇴 회유가 어느 정도 먹히기도 했지만 지회가 적극적으로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가입하는 인원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간 누적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이 우파 정부의 집권, 인플레이선 등 사정들과 결합해 사업장에서 더 큰 불만과 투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그런 상황에서 지회가 투쟁을 주도하고 조직을 성장시키면서 그동안 오랜 기간 힘겹게 조직을 유지시켜 왔던 것이 환하게 빛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