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들은 병원을 찾는다. 거주지와 가까워서, 지인에게 추천받아서, 특정 상병에 대한 전문성이 높아서 등 다양한 이유로 의료기관을 결정한다. 다만 마음대로 병원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신속하고 적극적인 치료가 절실한 산업재해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이야기다.
지정의료기관에서만 치료받아야 하는 피해자들
얼마 전 뇌경색을 산재로 인정받은 노동자는 통원치료가 가능한 재활병원을 수소문했다. 그런데 곧바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거주지 인근 재활병원 중 산재 지정의료기관은 3개밖에 없었으며, 이마저도 치료 일정이 가득 차 짧게는 3개월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재해자는 택시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병원도 고려했지만, 뇌경색 후유증으로 멀미 증상이 심해 포기했다.
문제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이 규정하는 지정의료기관 제도에 있다. 산재보험법은 근로자가 업무상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 요양급여를 지급한다. 다만 요양급여는 근로복지공단이 지정하고 승인한 산재보험 의료기관에서 요양한 경우에만 지급한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의 재해자는 산재 승인 이후 반드시 산재 지정의료기관에서만 치료받아야 한다. 심지어 치료받고 있던 병원이 비지정 의료기관이라면 산재 승인 이후 지정의료기관으로 전원해야 한다. 지난해 기준 전국의 지정의료기관은 전체 병원 대비 약 10%에 불과한 5천700여개에 불과하다. 이를 진료과목이나 지역별로 세분하고 재해자와 해당 병원의 사정 등을 고려하면 막상 재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관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에 산재 피해자들은 병원을 찾아 헤매다 적절히 치료받을 수 있는 시기를 놓치고 있다.
건강보험도 외면한 산재 피해자
산재 피해자들이 산재보험에서 지급하는 요양급여를 포기하고 비지정 의료기관에서의 치료를 선택할 순 없을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상당한 수준의 의료비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건강보험 가입자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발생한 비용 중 상당 부분을 건강보험 급여로 보장받는다. 다만 국민건강보험법은 건강보험 급여의 제한 사유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 ‘업무 또는 공무로 생긴 질병·부상·재해로 다른 법령에 따른 보험급여나 보상(報償) 또는 보상(補償)을 받게 되는 경우 건강보험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다.’ 이 규정은 다른 법령에 의한 보험급여나 보상을 현실적으로 지급받은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법령에 정한 보험급여나 보상의 요건이 충족돼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었던 경우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즉 산재를 승인받은 재해자가 비지정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선택해 산재보험에 따른 요양급여를 포기해도 건강보험급여 지급 제한 사유에 해당한다. 만약 건강보험급여가 지급됐다면 얼마 후 당신은 건강보험급여 부정수급을 이유로 환수조치 하겠다는 처분서를 받아볼 가능성이 높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 건강보험 보장률이 약 65%인 것을 감안하면, 재해자들이 비지정 의료기관에서 치료받을 경우 발생할 의료비는 감당 어려운 수준이기에 지정의료기관에서의 요양이 사실상 강제된다.
반드시 지정의료기관이어야 하나
“이 병원에서는 치료받아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산재 피해자들의 의료기관 선택권을 현저히 제한할 만큼 지정의료기관에서만의 요양을 고집할 이유가 있는지 생각한다.
지정의료기관이라고 해서 산재보험에 대한 보다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산재보험에 대해 티끌만큼의 이해도 가지지 못한 지정의료기관들, 예를 들어 산재신청을 위한 소견서나 장해진단서 작성 경험이 없다며 서류작성을 거부하는 등의 사례가 태반이다.
지정의료기관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의 기초적인 안내는 이뤄지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공단에 지정의료기관에 대해 문의하면 공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답변이 전부다. 지정의료기관이 어떠한 전문성을 가지는지, 재해자에게 어떠한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지 등의 정보는 당사자가 직접 찾아내야 한다. 심지어 재해자들이 지정의료기관에서만 치료받아야 한다는 내용은 승인통지서 뒷면에 ‘한 줄’ 기재돼 있다. 현재의 지정의료기관 제도를 통해 재해자가 얻을 수 있는 편의는 어떠한 것도 없다.
산재보험법은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를 신속·공정하게 보상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금의 지정의료기관 제도는 이를 방해하고 있다. 재해자 부담을 담보로 공단의 행정 편의만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적어도 지정의료기관 제도가 산재보험법 목적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