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직에 성소수자가 없는데 어떻게 성소수자를 배려합니까?”
전에 몸담고 있던 곳에서 성평등 캠페인을 하면서 들었던 얘기다. 바로 눈앞에 성소수자들을 두고 이런 얘기를 하는 그 사람의 무지할 자유가 좀 부러웠다. 그러게 말이다. 분명 있는 존재가 왜 눈에 보이지 않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다. 화장실 때문이다.
남녀로 구분된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성소수자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를 통해서였다. 이들은 외출하는 날 아침부터 웬만하면 물을 마시지 않고 밖에서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몇 안 되는 성중립화장실을 지도로 만들어 공유하고 약속장소는 그 주변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했다. 불평등한 화장실 때문에 이동권이 제약되고 학교와 직장에서 보기 힘든 존재들이 돼 간다.
왜 우리 회사에는 성소수자가 없을까? 사실은 어느 책 제목처럼 아마도 이미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남녀로 구분된 화장실을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1·2 나 3·4로 분류되는 것에 위화감이 없어 각종 서류와 입사지원서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으며, 너무 남자같이(혹은 여자같이) 생겨서 고객이 불편해 한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받을 가능성이 없는, 그러니까 가부장과 비장애인의 사회에서 정상성을 연기할 수 있도록 허락된 매우 운 좋은 퀴어만이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도 정상성을 수행하기 위해 이중 삼중의 거짓말을 짜내야 하고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도록 직장동료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등 ‘정상인’ 행세를 위해 당신보다 몇 배는 더 피곤하고 굴욕적인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자리, 그러니까 사람이 존재할 자리는 그렇게 사람을 가려 가며 주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구조적 차별’이라고 부른다.
차별은 화장실처럼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는 구조 속에 몸을 숨긴다. 그러나 이미 엄연하게 드러나 있는 여성 차별에 대해서까지 “구조적 차별은 없다”고 하는 대통령 당선자의 말은 지나치게 뻔뻔하다. 그래서 차별을 없애기보다 차별을 말하는 존재들을 지우고 가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장애인의 이동권 시위에 집권여당 대표가 될 사람은 ‘일반 시민’이 장애인들로부터 피해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누구를 시민으로 포함하고 누구를 시민의 자리에서 지우는가? 질 좋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노동자보다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할 수 있는 노동자, 성별 임금격차에 항의하는 노동자보다 차등 적용되는 최저임금도 기꺼이 감수하고 일하는 노동자만이 그들의 나라의 시민이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선거를 빌미로 매일같이 쏟아지는 혐오발언이 견디기 힘들다고 느낄 때쯤, 성공회대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화장실을 5년의 숙의 끝에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휠체어나 보조기구 이용자, 성별이 다른 보호자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 사람 등이 성정체성·나이·신체조건·보호자 동반 여부와 관계없이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섬세한 설비를 갖췄고 ‘모두의 화장실’이라 이름 붙였다고 했다.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으로 계단 이용이 어려운 모든 사람이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화장실에 퀴어를 포함하려는 노력은 기존 화장실에서 배제된 더 많은 이들을 포함할 수 있게 나아간다.
어떠한 시도에도 존재는 지워질 수 없으며 차별의 구조를 깨닫는 해방감을 한 번 맛본 사람들은 그 전으로 쉽게 돌아가지 못한다. 거센 ‘백래시’에도 살아남는 방법은 서로를 더 열심히 호명하고 공명해 목소리를 키우고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느릴지라도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화장실이 한 칸씩 생겨나는 것처럼 누구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자리는 결국 조금씩 넓어진다. 새로운 정부는 선을 그어 사람을 가르고 밖으로 밀어내려 할수록 오히려 더 시끄러워지고 커지는 연대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