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현경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참터)

몇 년 전부터 생긴 습관이 하나 있다. 책을 읽을 때 마음에 와닿는 글귀가 있으면 글귀 옆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는 것이다. 책에서 기억하고 싶은 글귀가 있는데 펜으로 줄을 치고 싶지는 않고, 고민하다가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포스트잇은 어느새 책을 읽을 때 필수 준비물이 됐고, 기억하고 싶은 글귀가 있는 페이지에 붙어 있다. 이렇게 내가 읽은 책에는 포스트잇이 빼곡히 또는 듬성듬성 붙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산 한 권의 책에는 포스트잇이 하나도 붙지 않을 것 같다. 마음에 와닿는 글귀가 하나도 없어서가 아니라,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의미 있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2146, 529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 숫자가 제목인 책에서 2146은 2021년 한 해 동안 산재(질병·사고 등)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숫자(추정치)고, 529는 그중 산재사고로 사망하거나 과로사한 노동자들의 숫자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삶의 터전인 일터에서 사고로 생을 마감한 노동자들의 마지막 기록인 것이다.

이 책에는 TV 뉴스 혹은 신문에서 산재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소식을 전한 보도 내용을 사고발생 일자별로 육하원칙 정도로 정리한 부고가 담겨져 있다. 사고가 없었던 날은 손에 꼽을 만큼 거의 없고, 매일 사고 소식이 있었다.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인 4월28일에도 어김없이 산재 사망사고는 발생했다. 노동절인 5월1일 등 휴일에도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들이 많았다. 사망자가 하루에 한 명만 있는 날도 있지만, 하루에도 각각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 사고로 여러 명의 노동자가 사망해 여러 건의 기록이 있는 날들이 더 많았다. 한 사람 생의 마지막이 보통은 두세 줄로, 많게는 대여섯 줄의 내용으로 정리돼 있다. 사망한 노동자는 모두 다르지만, 대부분의 노동자의 사고유형은 ‘떨어져, 깔려, 끼여’ 등으로 비슷하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많이 접하면서 죽음에 점점 무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 것이고, 어찌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가지 경로로 지인들의 부고, 각종 사건·사고 등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은 들었지만, 점점 인생에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커진 것 같았다. 특히 최근에는 매일 보도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한 사망 등의 소식으로 생의 마감에 더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누군가의 죽음, 특히 갑작스러운 죽음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한번 느꼈다.

사실 이 책은 한 페이지에 내용이 많지 않지만 한 장씩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일터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된 노동자들의 소식을 담담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본문을 먼저 읽지 못하고 머리말과 해설을 먼저 읽었다. 책의 머리말에는 “이렇게라도 노동자들의 죽음의 숫자를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이들을 숫자로만 기록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동시에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들의 숫자를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그들의 부고를 하나씩 읽어 가면서, ‘그들이 곧 우리’라는 점을 잊지 않는 데서 그 복원은 서서히 시작될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아마 이것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노동자들의 죽음을 한 권의 책으로 엮게 된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의 모든 노동자 사망을 접하면서 다시 한번 경각심을 느껴야 한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야 하고, 기록은 단순히 기록으로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하는 기억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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