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어릴 때 할머니 따라 면사무소에 갔다. 할머니는 면사무소 앞 점방에서 피지도 않는 담배 2갑을 샀다. 그땐 등본 한 통 떼는 데도 담뱃값이 필요했다. 이런 문화, 지금은 다 사라졌을까.

지난해 말 국무조정실에서 근무하던 20대 사무관이 휴대폰으로 동료 치맛 속을 불법촬영하다가 다른 동료에게 들켰다. 국무조정실은 경찰 통보에 그를 직위해제했다. 몰카 범죄는 고시에 합격한 MZ세대 엘리트 관료(5급)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해 7월에도 행정고시 출신 국토교통부 5급 사무관이 동료를 불법 촬영하다 들켰고, 기획재정부 소속 사무관도 성추행 혐의로 직위해제 됐다.

금융위원회 소속 사무관은 2019년 산업은행이 금융위에 보고한 미공개 자료에서 한 기업이 구조조정 기업에 투자한다는 사실을 알고 동생에게 500만원을 송금해 해당 기업 주식을 차명으로 샀다. 이 사무관은 이런 수법으로 주식 4천100여만원어치를 샀다. 감사결과에 금융위는 이 사무관을 과태료 300만원 처분하고 징계에 들어갔다. 업무상 미공개 정보를 만지던 그는 연일 ‘빚투’를 부추기는 언론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심지어 가상화폐 거래소를 감독하는 금융위 공무원이 해당 업계로 이직하는 사례도 속출한다. 금융위 한 사무관은 지난해 연말 빗썸으로 이직했고, 올 초엔 또다른 금융위 사무관이 코인원으로 옮겼다. 또 다른 가상화폐 거래소 업비트의 최고전략책임자(CSO) 임지훈씨도 금감원 출신이다. 돈만 더 주면 심판이 선수로 경기에 마구 뛰어든다. 영화 <광해>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서울 강동구청 투자유치과 7급 공무원 김모씨(47)는 15개월 동안 세금 115억원을 꿀꺽했다. 김씨는 2019년 12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무려 236차례나 돈을 빼돌렸지만 네 번째 후임이 올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김씨도 금융위 사무관처럼 빼돌린 돈으로 주식과 코인에 투자해 77억원을 날렸다. 자고 일어나면 ‘동학개미’ ‘서학개미’ ‘주린이’ 같은 신조어를 지어 내며 주식 투기를 부추긴 언론은 아무 말이 없다.

신변보호 대상자 가족 살해 피의자 이석준에게 피해자 집주소를 알린 출발점은 해당 구청 공무원이었다. 그는 2년간 주민의 개인정보 1천101건을 흥신소에 넘겨 3천954만원을 받아 챙겼다. 그 구청엔 그 말고도 이렇게 주소를 넘긴 공무원이 2명 더 있었다.

경기도 김모 팀장(52)은 2018년 SK반도체 개발예정지 정보를 이용해 인근 땅 470평을 아내가 대표인 법인 명의로 5억원에 사고, 수용 예정지 땅 255평을 장모 명의로 1억3천만원에 샀다. 6개월 뒤 공장부지가 확정되면서 이 땅은 시세가 25억원으로 뛰었다. 김 팀장은 부패방지법 위반으로 지난 1월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10월 부산에선 키스방을 운영해 온 법원 공무원이 경찰에 적발됐다. 그는 근무시간에도 성 매수자들이 연락해 오면 성매매를 알선했단다. 전남 화순군 주모 팀장(6급)은 마을 환경정비 사업을 하면서 자기 집 주위에 석축을 쌓고 국유지를 무단 점용했다.

반면 대전시청 새내기 9급 공무원 이우석(26)씨는 상사 책상과 쓰레기 정리, 커피·신문까지 챙겨야 하는 공직사회의 후진적 문화에 질려 지난해 9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지난해 1월엔 불법 주정차 과태료 이의신청 민원에 시달려 온 서울 강동구청 새내기 공무원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근무하던 20대 공무원도 지난해 2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동료들 사이에 직장내 괴롭힘이 원인이란 지적도 있지만 서울시는 부인했다.

옛것은 갔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언론이 장삿속으로 MZ세대를 들먹이지만 정작 문제 해결엔 눈을 감는다. 언론이 세대갈등에 쏟는 힘의 1%라도 중세 봉건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낡은 문화를 부수는 데 썼으면 한다. 21세기에 이렇게나 ‘문화지체’를 보이는 나라가 또 있을까. 왜 공무원이 주민 식사 대신 과장 점심을 걱정해야 하나.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