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물컵 갑질’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한진가의 딸 조현민씨가 최근 승진했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13일 경제섹션 4면에 ‘한진그룹 조원태 회장 동생 조현민 사장 승진’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한국일보도 같은날 12면에 ‘조현민 한진 부사장, 1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이라고 보도했다. 한국일보 기사 제목만 보면 조씨가 부사장에서 1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할 만큼 무슨 대단한 실적이라도 낸 것 같다. 한겨레만 같은날 18면 기사 제목에 ‘물컵 갑질’을 달아 조씨의 과거 행적을 드러냈다.

요즘 ‘멸공’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정용진 부회장이 있는 신세계가 중고거래 시장에 눈독을 들였다. 매일경제는 이를 지난달 12일 22면에 ‘신세계, 번개장터에 투자, 중고시장 겨냥 협업 노력’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매경은 대기업 신세계가 중고거래 시장에도 뛰어들어 시너지를 창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를 우려의 눈길로 바라본 언론도 있다. 경향신문은 같은날 17면에 ‘중고거래 시장 커지자 대기업도 눈독’이란 제목으로 이를 보도했다. 물론 대기업이 가진 장점을 중고거래 분야까지 확장하면 시장이 더 커질 공산은 크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수익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편법 승계와 배임 논란을 빚었던 사조그룹 회장의 장남 주지홍 부사장도 지난달 5일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내일신문은 같은날 16면에 이를 ‘주지홍 사조그룹 부회장 승진’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반면 한겨레는 다음날 17면에 ‘편법 승계·배임 논란 사조 장남 주지홍, 부회장 승진’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두 신문 제목은 큰 차이를 보인다.

2018년 액상 대마를 밀수하고 피운 혐의로 구속됐던 SPC그룹 허영인 회장의 차남 허희수 부사장도 지난해 11월 그룹 신사업 담당 계열사에 책임임원으로 복귀했다. 대마 사건이 터졌을 때 SPC그룹은 차남을 경영에서 퇴출시키겠다고 했지만 그는 집행유예 기간 중에 현업에 복귀했다. 이때도 대부분의 언론은 조용했다.

허 부사장처럼 2019년 액상 대마를 피우고 국내에 밀반입한 CJ그룹의 장남 이선호 부장도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임원으로 승진했다. 그도 집행유예 기간 중에 회사에 복귀했다. 그가 연말 인사에서 임원에 승진하자 서울신문은 지난 12월28일 22면에 ‘이재현 회장 장남 경영 리더 승진, CJ그룹 경영 승계 시계 빨라진다’는 제목을 달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보도했다. 반면 한겨레는 ‘집행유예 CJ 장남 초고속 임원 승진’이란 제목을 달아, 그가 집행유예 기간인데도 복귀는 물론이고 이번엔 초고속으로 임원까지 승진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처럼 보도하는 게 재벌을 향한 불필요한 트집 잡기일까. 언제든 재발하기 쉬운 오너 리스크를 독자와 국민에게 알려주는 게 언론의 도리다. 왜 나머지 대부분의 언론은 이토록 재계 오너 자녀의 일탈에 너그러울까.

지난달 5일 여러 언론이 30대 젊은이가 보령제약 사장이 됐다고 보도했다. 그가 엄청난 능력 때문에 불과 37살에 국내 굴지의 제약사 대표이사가 됐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그는 그냥 창업자 손자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을 뿐이다.

이런 계층 간 대물림은 21세기 들어 더욱 심각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전 세계 99%가 소득이 줄었는데 10대 부자의 자산은 2배가 늘었다는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팬데믹 2년 보고서도 나왔다.

예일을 포함한 미국 16개 명문대가 장학금을 줄이는 바람에 중산층 이하 학생들 입학을 막고, 대신 금수저들의 특혜 입학을 늘려 온 혐의로 고발당했다. 가만 놔둬도 양극화를 키우는 세상에서 언론마저 여기에 편승하면, 언론은 영원히 기레기 소리를 면치 못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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