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혼돈의 시대다. 카오스이론은 이런 혼돈을 과학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렇다고 과학이 세상의 혼돈을 모두 해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과학은 끊임없이 제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언론도 과학에 기반해 세상일을 해석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요즘 언론은 혼돈을 해석하기는커녕 혼돈을 더 부채질해 혼돈을 혼돈으로 덮는다. 부채질하는 손엔 과학 대신 관념과 편견이 쥐어져 있다.

언론은 지난 13일 오스템임플란트 이아무개 부장이 빼돌린 돈으로 산 금괴를 모두 찾았다고 보도했다. 이날 한국일보와 서울신문은 이 소식을 사회면(10면)에 속보로 전했다. 한국일보는 ‘오스템 횡령 금괴 851개 다 찾았다’, 서울신문은 ‘오스템 직원 횡령 금괴 855개 다 찾았다’는 제목을 각각 달았다.

횡령한 직원이 애초에 사들인 1킬로그램짜리 금괴 숫자부터 851개와 855개로 서로 다르다. 두 신문 제목만 보면 우리 언론이 취재현장에서 기사의 기초가 되는 팩트를 얼마나 부실하게 확보하는지 잘 보여준다. 혼돈 그 자체다.

800여개의 1킬로그램짜리 금괴 가운데 고작 4개 틀린 걸 너무 과장한다고도 하겠지만, 1킬로그램 1개 가격은 8천만원쯤 한다. 4개라면 3억원 이상 가격 차가 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가 지난 12일 경총 회관에서 10대 그룹 CEO를 만났다. 덕담 수준의 발언도 오갔지만, 기업 관련 중요 발언도 나왔다. 서울신문은 13일자 3면에 이 후보가 “중대재해 없게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며 이를 쌍따옴표로 표시해 제목을 달았다. 반면 조선일보는 같은날 6면에 이 후보가 “중대재해법 실제 적용 어려워, 걱정 말라”고 말했다고 제목을 달았다.

두 기사 제목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서울신문 제목은 중대재해가 일어나면 CEO를 처벌해야 하니 안전 관리를 잘하라는 주문으로 들리지만, 조선일보 제목은 ‘중대재해법, 그 까짓 것, 별것 아니니 걱정 마라’는 말로 들린다.

이재명 후보의 부동산 관련 발언을 담아낸 지난 14일자 서울신문 4면 머리기사엔 ‘용적률 500%, 안전진단·층수 규제 완화 … 이재명 親시장 3종 세트’라는 제목이 달렸다. 그동안 더불어민주당이 해 왔던 부동산 관련 정책은 뒤집었다. 필요하면 뒤집는 게 맞다. 그러나 마치 국민의힘 공약 같았다.

이러니 두 후보 공약을 놓고 한국일보는 지난 15일 1면 머리기사에서 ‘도대체 누구 공약인지?’라는 제목을 달았다. 두 후보 부동산 공약은 임기 내 250만 가구 공급에, 용적률 500%까지 대폭 완화, 다주택자 중과세 1~2년 유예, 집 공시가격 현실화 속도조절 또는 2020년 수준으로 환원 등 갈수록 닮아 간다.

이는 두 후보로 대표되는 양강 두 정치세력의 가치와 철학이 원래 별로 다르지 않아서다. 이처럼 서로 닮았는데도 서로 다른 척하며 마치 한 하늘 아래 같이 못 살 집단인 듯 몰아세우는 꼴이 더 가관이다.

여기서 우리 언론은 딱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두 집단 중 한쪽 편에 서서 상대를 미친 듯이 물어뜯으며 자기 편을 무조건 편드는 언론이다. 둘째는 두 집단이 정치의 모든 것인 양 양측을 기웃거리며 양적 균형을 맞추려 하는 기계적 중립 언론이다.

70년 넘게 이 짓만 해 왔으니 한국 정치는 여전히 ‘신탁 대 반탁’ 수준을 못 벗어났다. 언론이 국민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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