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경아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경남사무소)
▲ 최경아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경남사무소)

“노동법을 단순히 민사법의 특별법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럼 의심스러울 때 노동법의 기본원리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스러울 때 민사법 원리로 회귀하게 된다.”

대법관이셨던 분의 강연 중 정신이 번쩍 드는 문구였다. 노동사안에 접근할 때에는 노동법의 독자적인 법리가 형성된 경위와 그 의의에 입각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법률가로서 고유한 노동법리에 따른 판단과 논거 제시의 과업을 충실히 임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측면에의 자성을 촉구하던 중 나온 말이었다.

그간에는 노동관계에 대해 민법이 ‘보충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기화로, 노동법을 어떻게 적용할지 여부가 의심스러울 때 곧장 민법의 영역으로 ‘돌아가야’ 하는 양 민법 개념을 단편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사이 우리 사회에는 불안정한 지위의 노동자뿐 아니라, 노동법의 보호영역에 서는지조차 의심받는 노동자들이 변칙적으로 양산됐다. 그리고 그 지위가 의심스러울 때 노동법적 접근이 아닌 민법상 도급이나 위임의 영역으로 곧장 끌려가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판정을 받기 일쑤다. 노동법이 길을 잃으니 노동자도 사라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노동법이라는 나침반을 적극적으로 왜곡하거나 빼앗는 일도 빈번하다. 마치 나침반의 N극과 S극을 유성펜으로 바꿔 적듯, 명칭이나 형식상 ‘도급’이나 ‘위임’의 외관을 빌려 근로자가 아니라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시도부터, 이미 서로 고용관계라 인지하고 이어 온 관계에서까지 ‘다시 보니 모든 면이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며 의심스러우니 나침반 대신 줄자를 가져다 대겠다는 식이다.

실제로 담당하는 사건 중에는 ‘퇴직금 사전포기 약정’ 꼼수를 들어 수십 년간 근속해 온 노동자의 퇴직금 지급을 거부하다가 법리상 무효라는 점이 확인되자, 자신들이 체계적으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정 등을 기화로 돌연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니 퇴직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거부해 다투는 사건도 존재한다. 결국 그는 노동자임이 확인될 것이지만, 의심스러울 때 민사법 원리로 회귀할 여지가 주어짐에 따라 당연히 받았어야 할 노동의 대가임에도 공연히 방대한 입증책임의 짐까지 떠안아야만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은 더욱 심각하다. ‘고용유연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비정규직과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양산은 그 지위의 불안정성만큼이나 근로조건을 열악하게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여기에 노동법의 보호영역인지 의심스럽다는 딱지까지 붙고 나면, 노동자로서는 법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이처럼 노동법이 길을 헤매는 사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됐다. 당장 올해만 해도 세계불평등연구소의 ‘세계불평등보고서 2022’에 의하면 한국은 서유럽만큼 부유하나 빈부격차가 심각한 국가라는 분석을 받았다. 한국은 ‘상위 10%’가 전체 부 중 절반을 넘는 58.5%를 보유하는 동안 ‘하위 50%’는 전체 부의 5.6%만을 보유하는 것에 그쳤는데, 한국 인구가 열 명이라고 가정하면 그중 한 명이 다른 다섯 명의 합보다 52배나 더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1990년대와 비교하면 ‘상위 10%’의 몫이 10% 늘고 ‘하위 50%’의 몫은 5%가량 줄어든 수치에 해당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더 이상 노동으로는 삶을 영위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추세다. 청년들은 고용불안이 일상이 된 나머지, 누군가가 고용안정에 이르는 것을 ‘회복, 개선’이라 받아들이기보다는 ‘불공정, 질시’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까지 보인다. 정직하게 사는 건 미련하다고까지 자조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누군가 따면 누군가는 잃는 ‘제로섬 게임’과 같은 코인 등 투기판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연거푸 흥행한다.

이처럼 노동법이 길을 잃으면 노동자도 사라지고 노동도 사라진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 자체를 없애고자 하는 취지가 아니라면, 노동법이라는 나침반을 흔들거나 왜곡하려는 시도를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단 법률가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노동사안에 관해 의심스러울 때 단순히 민법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 노동법의 기본원리로 향해야 한다는 점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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