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편집 김혜진 기자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원고에게 평생 무한 책임을 지우는 것은 너무나 부당합니다. 대리점에 돈을 다 갚는 것을 끝으로 이제 족쇄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한 원고가 대리점의 또다시 시작된 변제 요구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지난 1일 휴대전화 대리점의 1천800만원 손해배상 요구가 부당하다며 전직 여직원이 낸 소송의 마지막 변론에서 변호인은 재판장에게 간곡히 호소했다. 여직원도 옆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발언을 겨우 이어나갔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서 이렇게 대하는 건가요. 살고 싶은데 왜 내버려 두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가 더는 없었으면 합니다.” 이제 스물다섯 살의 이 여직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스물한 살에 휴대폰 대리점 첫 취직
“무한책임” 계약서 한 장에 쥐어짜인 노동자

9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A(25)씨는 2017년 2월 친구의 소개를 받아 KT의 위탁대리점인 B사에 입사했다. 스물한 살의 나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첫 직장이 생긴 그는 열심히 일을 배웠다. 주 6일을 근무하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11시간 동안 휴대전화 판매·개통, 매장 청소, 고객 응대 업무를 수행했다. 월 기본급 120만원과 인센티브를 약속받았다.

그런데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8년께 ‘무과실·무한책임’ 내용이 들어간 판매위탁계약서에 서명한 점이 화근이었다. 회사는 2017년 7월 급여를 주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다음달에는 휴대전화를 분실했다며 A씨에게 800여만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적을 채우지 못했다며 그해 11월분까지 급여를 아예 지급하지 않았다.

생활이 어려워진 A씨는 급여를 가불받았다. 8월 150만원, 11월 50만원, 12월 350만원. 회사는 치밀했다. 이듬해 1월부터 A씨에게 가불금 상환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차용증을 작성하고 공증까지 받게 했다. 차용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천890만원에 달했다. 이자만 연 8%였다.

급여를 당겨 썼기 때문에 회사에 돈을 갚아 나가야 했다. 매달 50만~200만원이 급여에서 빠져나갔다.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거의 없었다. 겨우 2년여 만에 가불금을 모두 갚았다. 상환을 끝낸 A씨는 2019년 7월을 마지막으로 퇴사했다. 입사한 지 2년5개월 만이었다.

퇴사했는데, 고객불만 배상 1천800만원 요구
휴대폰 기곗값도 청구, 수차례 극단적 선택 시도

그런데 퇴사가 끝이 아니었다. 회사는 A씨로 인해 또 다른 손해를 입었다며 400여만원의 손해배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지난해 6월 서울보증보험에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1천만원의 이행보증보험금을 청구했고, 두 달 뒤 A씨에게 1천780만원을 변제하라고 요구했다. 이 중 480만원은 갚지 않은 가불금이고, 나머지 1천300만원은 A씨가 판매를 잘못해 회사가 입은 손해란 것이다.

회사는 고객과의 거래 후 17개월이 지나서 들어온 고객 불만사항에 대해서도 배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퇴사한 직원에게 근무 당시의 책임을 묻는 셈이었다. 끊어 낼 수 없는 ‘족쇄’가 채워졌다.

회사가 주장하는 A씨의 책임 유형은 다양했다. △고객 추가지원금 불이행 △유선요금 이중처리 △신규가입 후 기존 미납요금 미처리 △고객 동의 없이 패드 개통 △할부금 지원금 누락 △해지위약금 미지급 등 무려 52개에 달했다. 심지어 한 고객에게 재판 증언을 대가로 휴대전화를 주고 기곗값 100여만원을 A씨에게 청구했다는 내용의 녹취록도 있었다.

회사의 지속적인 독촉에 시달린 A씨는 극심한 우울증에 걸려 여러 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대인기피증에 공황장애까지 발병해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했다. 극한 상황에 몰린 A씨는 지난해 11월 공인노무사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상대로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소송을 냈다.

대리점의 황당 주장
“직원이 판매사, 무과실·무한책임”

그러나 회사는 재판 과정에서 A씨를 철저히 ‘개인사업자’라고 봤다. A씨 자체가 ‘판매사’이므로 휴대전화 처리업무에 따른 책임은 A씨 본인이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과실이 없더라도 계약서에 따라 ‘무한책임’이 있다는 취지다.

사측은 ‘계약 형태 확인서’와 ‘위탁 판매 및 영업 운영 계약서’를 내밀었다. 확인서에는 ‘본인의 판매 건에 수반된 사후 관리까지 책임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계약서에도 ‘을이 체결한 계약 건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고객 민원은 을에게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나아가 판매에 수반된 사후 관리까지 책임이 있다는 점을 확인받기까지 했다.

이를 근거로 사측 대리인은 “고객들에게 휴대전화를 판매한 후 고객관리를 A씨가 성실히 이행하지 않아 부득이 회사가 선 처리한 비용에 대해선 원래 책임자인 A씨에게 해당 비용을 구상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A씨가 스스로 소비자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휴대전화를 판매했기 때문에 경제적 이익을 직접 얻은 당사자가 이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퇴사 이후에 발생한 고객불만에 관해 A씨가 책임을 지는 것도 당연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사측은 “A씨의 주장은 마치 자동차 제조사가 제품을 판매한 후 소비자들의 불만 제기에 대해 고의·과실이 없으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식의 논리와 동일하다”고 항변했다. A씨의 사후관리 의무를 회사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물려받아 회사 부담으로 처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 KT대리점 모습.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홍준표 기자>
▲ KT대리점 모습.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홍준표 기자>

직원측 “대리점, 우월 지위 이용해 이익만 취득”
15일 1심 선고, 대리인 “평생 무한책임 부당”

A씨측은 회사와 A씨 사이의 법률관계는 ‘반사회적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퇴사한 이후에도 대리점에 들러 전산 업무를 통해 고객불만을 처리했어야 한다는 사측의 논리는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A씨를 대리한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마지막 변론에서 “이 사건의 본질은 회사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이익만 취하고, 위험은 A씨와 같은 직원에게 전가했다는 것”이라며 “고객이 잘못하거나 고객이 막무가내로 요구한 경우에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A씨에게 책임을 미뤘다”고 비판했다. 이어 “회사는 A씨가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주장하지만, A씨는 부당이득을 취한 바 없다”며 “회사도 A씨가 어떤 부당이득을 취한 것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입증된 바도 없다”고 덧붙였다.

특히 판매의 책임 주체는 개별 판매원이 아닌 ‘대리점’이라고 강조했다. 윤 변호사는 “고객 관리를 통해 이익을 얻는 자는 대리점”이라며 “회사는 이동통신 요금액의 일부를 관리수수료로 받는 등 꾸준히 이익을 얻고 있으므로 고객의 불만을 잠재우고 고객의 욕구를 충족해 줄 필요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판매직원이 거래 건당 수수료만 받지, 요금 일부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닌 만큼 A씨는 사실상 회사에 종속돼 일했다는 것이다.

고객불만 책임을 명시한 확인서와 계약서도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A씨측에 따르면 대리점 직원들은 ‘일하는 데 필요한 계약서니, 서명하라’는 요구에 따라 내용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서명했고, 회사가 사본을 교부하지 않았다.

A씨측은 법원이 청구를 모두 인용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윤 변호사는 “경영상 이익을 얻는 것은 회사이므로 그에 따른 위험이나 책임도 회사의 부담”이라며 “그러나 회사는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모든 책임을 직원에게 떠넘긴 ‘악질적인 갑질’을 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KT에 대해서도 “이 사건은 근본적으로 거대 통신사가 대리점에 책임을 전가하고, 대리점이 다시 직원들에게 책임을 지워 벌어진 일”이라며 “KT도 무관하지 않은 만큼 직원들에게 갑질하는 회사에 대해선 계약갱신을 거절해 책임 있게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사건은 15일 인천지법에서 1년 넘게 끌어온 1심의 결론이 난다. 이 사이 A씨는 한 살을 더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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