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공기청정기·비데·청소기 등 다양한 가전제품을 제품별 주기에 따라 정기적으로 고객 자택이나 사무실을 방문해 관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제품을 제조해 판매 또는 임대하는 회사가 다양한 만큼 판매되거나 임대된 가전제품을 관리하는 회사 역시 다양하다. 그런데 취업한 회사가 달라도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먼저 이들은 온라인 구인공고 사이트나 지인 소개 등 다양한 경로로 회사에 취업한다. 그런데 회사는 이들과 근로계약서가 아닌 업무위탁 등 도급계약서를 작성한다. 이는 회사가 노동자를 채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 있는 한 명 한 명의 ‘사장님’과 계약을 하는 형태라는 의미다. 회사가 일정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계약하는 ‘사장님’이 수천 명에 달하는 모습은 어딘가 기이하기도 하지만, 계약자가 한 명이든 수천명이든 회사가 정한 계약 형식상으로 이들은 ‘사장님’이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이들은 사장님 즉 자영업자라고 하기에는 다른 자영업자들처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회사에서 업무 수행을 위한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고, 회사가 정한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제품을 관리하는 방법도, 고객을 대하는 방법도 모두 회사가 정한 내용을 따라야 한다. 또한 이들은 회사가 준비해 둔 작업 도구를 지참하고, 회사가 알려 주는 주소를 확인해 고객 자택을 방문한다. 그리고 계약상 가장 중요할 수 있는 업무 수행의 대가 역시 회사가 그 지급 기준을 정한다.
이상한 것은 또 있다. 이들은 ‘사장님’임에도 종업원을 둘 수는 없다. 회사가 ‘위탁’한 업무를 타인이 수행하게 할 경우를 계약해지 사유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하는 업무가 회사의 부수적인 업무냐 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이들이 하는 가전제품 유지·관리 업무는 회사의 사업 수행에 필수적인 업무이자 핵심 업무다. 이것은 다시 말해 A사의 핵심 업무를 B사, C사, D사 등 여러 회사의 여러 사장님들이 나눠서 수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사항들을 포함해 그 어떤 사항에 대해서도 회사와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할 수 없고, 모든 것은 회사가 정한 대로 따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실체는 사장님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회사로부터 사장님의 외피를 두른 채로 회사와 계약했지만, 그 실상은 회사를 위해 노무를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취득하는 노동자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자로서 노동조합을 조직했다. 이들에 대해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그리고 고용노동부도 노동자라고 인정했다. 노동조합을 조직한 이들은 회사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요구사항의 뼈대는 합리적 처우와 안전한 업무수행 보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회사는 이들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단체교섭 요구에 일절 응답하지 않았다.
회사의 계속된 교섭요구 무시는 결국 법정 다툼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러나 법정 다툼이라는 것은 1~2개월 안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 다툼이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아니면 5년이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스스로의 근로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겠다고 어렵사리 모인 사람들에게, 아무런 성과가 없어 보이는 이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2021년 11월 현재, 이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한 후 이미 길게는 1년반이 넘는 시간이 흐르도록 회사와 아무런 교섭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3년, 5년 흘러 법정 다툼이 종결된 결과 대법원에서 이들이 노동자임을 확인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흘러간 시간은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약화되고 유명무실하게 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는 너무나도 부당하다. 헌법이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노동 3권을 사용자의 꼼수에 의해 좌지우지한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에서 무늬만 사장님인 통칭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 3권은 이렇듯 사용자의 억지 주장만으로도 쉽게 공격받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노무를 제공해 생계를 꾸려 가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노동자이고, 노동자로서 노동 3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사용자가 노동법을 회피하기 위해 부리는 꼼수에 대해 단호한 처벌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