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요한 공인노무사(노동해방노동법률사무소)

이 글의 제목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책 제목에서 따왔다. 노무사 직무와 관련된 소소한 일상을 다뤄야 할 노노모 에세이에 웬 뜬금없는 거대담론이냐는 이들도 있겠다만, 개의치 않고 거대담론 한번 읊어 보겠다.

흔히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며, 실현 가능한 구체적 대안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당장 실현 불가능한 의제를 입에 올리는 건 관념적 급진성에 불과하다는 비판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더딘 일상에서 근본적 목적과 지향을 잃었을 때, 우리는 차악(次惡)과의 타협으로 내몰리기 일쑤다. 차악도 마찬가지로 악이다. 차악과의 타협이 습관이 됐을 때, 최악과 차악의 경계선은 오직 관념적 허상으로만 존재한다. 진보와 퇴보가 엇갈리는 역사의 변증법적 과정 속에는 근본적 지향을 명확히 해야만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증진하는 진보적 체제가 아니다. 인민을 신분제의 굴레에서 해방하고 눈부신 생산력 발전을 실현했던 자본주의. 한때는 모두가 찬탄해 마지않았던 진보적 자본주의는 이제 역사 속으로 완전히 소멸했다. 고 노회찬의 표현을 비틀어 빌리자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만인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딱 만 명만을 위한 체제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낡고 부패한 부정의(不正義)의 체제가 됐다.

첫째, 생명과 환경보다 자본의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그냥 두고서는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기후재앙에 대응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산업화 이후 지구 평균기온이 고작 1℃ 남짓 상승했음에도 극단적 기상이변이 속출한다. 거대 산불·폭우·폭염·가뭄 등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이 지구촌 곳곳에서 이어진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6차 보고서가 단언했듯이, 이는 화석연료의 사용을 통해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해 온 자본주의적 산업활동의 결과다. 누구나 재앙을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자본의 이윤 증식이라는 자본주의 절대 가치 앞에서 기후변화의 절박함을 호소하는 청년들의 외침은 세상 물정 모르는 낭만적인 소리쯤으로 치부된다. 단적으로 2050년에도 석탄발전을 계속하겠다는 것을 ‘탄소중립 시나리오’의 하나로 내놓는 국가와 자본의 철면피함을 보라!

둘째, 근본적 체제 전환이 아니고서는 격심해지는 소득 불평등, 자산 불평등 문제에 대응할 수 없다. 이윤율 저하로 활력을 잃어버린 자본주의는 돈 찍어내기와 금융투기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부동산·주식·코인 같은 투기 열풍 속에서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빈자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특히 부동산 가격 폭등을 지켜보면서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빚투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던 흙수저 무주택자들의 절망과 분노가 세상을 뒤덮은 지 오래다. 집을 구할 수 없는 청년 세대의 절망은 더 커질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심화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평등 문제는 오로지 변혁적 조치를 통해서만 해소 가능하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소비 수단의 … 분배는 생산 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부의 불평등이 한편에서는 사회의 생산수단을 사유화한 자본가 계급이, 다른 한편에서는 (비싸게 팔든 싸게 팔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이 대립하는 생산 방식 자체에서 기인한 것임을 뜻한다. 이 근원적 모순을 외면한 채 사소한 개량적 조치로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의 고도화한 자본주의에서 순진한 낭만에 불과하다.

셋째,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되지 않는 5명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들,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조차 인정받기 어려운 플랫폼 노동자들, 일상적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 노동자들, 그리고 좁은 취업문 앞에 일자리조차 얻지 못한 채 경쟁에서 도태된 청년들…. 누구도 조명하지 않는 이들 밑바닥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노동권을 보장하는 문제는 자본에게 더 많은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동의어다. 다른 자본과의 경쟁 때문에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자본에 맞서자면, 그리고 충분한 이윤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예 투자도 하지 않겠다는 협박을 일삼는 현대 자본에 맞서자면, 노동자들이 직접 이 사회를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표출해야만 한다.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안전·생태계 보호 등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사회를 우리는 사회주의라 부른다. 한 줌도 안 되는 극소수 자본권력이 사회를 제 맘대로 독재하는 체제 대신,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 아래 단결한 노동자 대중이 사회적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체제를 우리는 사회주의라 부른다. 역사는 단결한 노동자가 세상을 직접 운영할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수차례 실증했다. 물론 기껏해야 노동조합 운동조차 버거운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 먼 얘기로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주의라는 근본적 지향을 숨기거나 이를 먼 미래의 과제로 남겨 둘 한가한 시대가 아니다. 청년들이 하루에 열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체제의 앞날은 지금보다 더 암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소리 높여 거대담론을 부르짖는다. 봉인됐던 노동자들의 거대한 잠재력을 해방시키고 표출하는 것이 마땅한 시대다. 야만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원한다. 사회주의 시급하다. 아니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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