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모든 신분적 억압을 불의로 인권선언하고서 ‘자유’로운 자본에 의한 노동의 지배를 정의로 규정한 노동체제가 시작됐다. 이후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노동운동의 역사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 자본의 세상에서 노동·노동자의 존재는 사라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 노동운동의 역사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역사가 사라졌다. 18세기 말 프랑스 시민혁명기에 바뵈프의 선언이나, 차티스트 등 영국의 노동조합법 제정운동까지는 아니라도, 국제적 규모로 노동운동사가 쓰이기 시작하고 단결금지법제 폐지가 시작됐던 19세기 후반부터 셈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사는 150년 이상 계속돼 왔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노동운동의 역사로서 당당히 기록될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대한민국에서 노동운동을 두고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일찍이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오늘 같은 시대는 없었다. 노동운동은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위해서 투쟁해 왔다. 이 세상을 자본의 세상이라고 규정짓고서 언제나 노동의 세상을 그리면서 투쟁해 왔다. 그런데 이런 투쟁의 역사가 노동운동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단계적·평화적·타협적·기회주의적이라도 당연하게 그려 오던 운동의 역사가 사라졌다. 노동운동으로 보자면 분명히 역사의 실종이다. 오히려 노동운동으로 쟁취했던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조차 플랫폼노동, 비정규직 등 자본의 새로운 대응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정도로 오늘은 역사의 실종이 아니라 역사의 퇴보가 두려운 지경이 돼 버렸다. 반노동의 역사, 자본의 광포한 역사만 흘러가고 있다.

2. 이렇게 거창하게 쓰고 나니 내 머리는 막막하다. 하나도 내 손에 잡히는 것 없이 허우적대고 있다. 세계로 거대하고 높이 추상했더니 땅을 딛지 않고 허공에 떠 허우적대는 듯하다.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사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이제야 현실의 땅을 딛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이다. 날 것 그대로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나아가는 이 나라 노동운동의 역사, 어떻게 기록될까.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이라고 해 봐야 노동조합의 투쟁이 사실상 전부다. 민주노총·한국노총 등을 망라해 노조 조직률이 겨우 10%를 웃도는 정도에 불과한 이 나라에서 그 노조의 투쟁이 사실상 노동운동의 전부인 것이라면, 이 나라 노동운동이 이 자본의 세상에서 스스로 노동의 세상을 그리는 투쟁을 전개할 수 있을까. 어렵다. 당연히 요구는 무시되고 투쟁의 외침만 거셀 뿐이다. 해마다 총파업·총력투쟁 등 투쟁 선포는 요란해도 결과는 없다. 대표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지난 20여년간 이 나라 노동운동은 산별교섭체계 확립을 위해 산별교섭을 요구하고 그 쟁취를 위해 투쟁했지만 의미 있는 결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긴 어렵다. 총파업·총력투쟁을 외치면서 투쟁했어도 결과는 내세울 게 없다. 물론 금융노조 등 일부 산별노조에서는 사용자들을 압박해서 사용자단체를 조직해서 산별교섭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쟁취한 산별교섭의 결과는 내세울 것이 없다. 체결된 산별협약은 대부분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로서 조합원에게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기업별노조 때처럼 여전히 사업장단위로 체결하는 협약에서 실제로 자신의 권리가 정해지니 조합원은 이에 관심이 있다. 그래도 오늘도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산별교섭체계 확립을 위해서 산별교섭을 요구하고 투쟁하고 있다. 아직 이에 이르지 못한 노조들은 이를 위해서 산별 전환을 추진하고 있으니 이들까지 포함하면 이 나라 노동운동을 이렇게 평가하는 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냉정하게 보자면 교섭체계 확립은 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의 결과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산별노조로서 커다란 조직력을 갖추고서 강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다면 사용자들이 사용자단체를 조직해서 산별교섭에 나와 산별협약을 체결하고자 한다. 개별 사용자로서는 산별노조에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투쟁의 상대방들에게 하나로 단결해서 자신을 상대하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투쟁의 상대방들은 단결해서 상대하는 것이 자신들에 유리하다면 하지 말래도 스스로 사용자단체를 조직해서 산별노조에 대응할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산별교섭체계 확립을 위한 산별교섭을 쟁취할 힘도 없고, 노조가 투쟁으로 쟁취할 것도 아닌 걸 두고서 전개돼 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도 산별교섭체계 확립을 위한 요구와 투쟁은 힘없이 계속되고 있다.

3. 이렇게 이 나라에서 산별노조·노동운동이 힘이 없으니 조합원의 자유와 권리는 사업장단위의 교섭, 즉 기업별교섭과 이에 따른 협약에 기대게 된다. 물론 과거 기업별노조에서의 행태가 재현될 것을 염려한 일부 산별노조의 경우 교섭권위임을 제한하고 있긴 하다. 금속노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해마다 관심은 현대자동차 등 기업별교섭에 집중되고 있다. 아무리 교섭권을 위임하지 않는 모양새를 갖춘다고 해도 별수 없이 현대차 노사의 교섭인 것이고 현대차의 협약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은 분명하다. 조합원을 위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가 어떻게 정해지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이에 대해서 중소·영세 사업장을 예로 들면서 금속노조를 통해 교섭하고 협약을 체결해서 그 조합원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노라고 이견을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나는 주된 것, 대다수 조합원에게 해당하는 것을 두고서 냉정히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람과 현실은 다른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와 같이 여전히 기업별로 교섭과 투쟁이 집중돼 전개되고 있으니 노동운동의 역사도 이를 외면하고서 기록돼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역사는 없다. 기껏해야 기업지부의 정기대의원대회 자료집에 주요 활동 내용이 수록돼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 활동을 한 해당 집행부가 작성해 보고한 것이니 제대로 평가하고 기록한 것이긴 어렵다. 이것이 전부다. 온갖 일들이 있었다. 차마 노조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일들이 노조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어용노조라 불리는 일부 노조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당당히 민주노조라 자칭하는 노조에도 해당하는 일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에게 노동자로서 자유와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교섭과 투쟁하는 노동자의 단결체다. 이 나라 대한민국의 헌법 33조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1조의 목적, 2조의 정의에서 노동조합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활동하지 않는 노조는 노동조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해마다 일어나고 있다. 기업별교섭에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 어용노조 위원장이 조합원 몰래 하는 교섭과 그에 따른 협약 체결이 아니고, 당당히 공개적으로 교섭하고 협약을 체결하는 데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이상하게도 조합원의 권리를 두고서 사용자와 교섭하고 협약을 체결하는 일을 한다. 이미 조합원의 권리인 것을 두고서 하는 교섭이니 당연하게도 그 권리를 삭감하는 데도 노사 간 협상이 진행되고 그러한 결과가 협약으로 체결되게 된다. 최근 10년간 노동자권리로 주된 관심사가 됐던 것을 예로 들자면, 통상임금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있다. 이에 대해서 기아차와 현대차를 비롯해서 많은 교섭과 투쟁이 있었고 노사합의라는 결과가 있었다. 아쉽게도 조합원의 임금권리를 삭감하는 노사합의였고, 비정규직 조합원의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상 권리를 삭감하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보자면 모두가 근로기준법과 파견법이 보장한 권리에 미치지 못하는 합의로 귀결됐다. 물론 변명은 있다. 사용자가 들어주지 않으니 하루라도 빨리 보장받고자 합의에 이른 것이라고 하는 변명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위에서 규정한 노동조합의 존재이유로 보자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조합원의 권리 삭감은 노조의 목적이 아니고, 그러한 활동을 하는 노동자단체를 노조로 정의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경우 노조가 조합원의 권리를 삭감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이는 그걸 교섭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않으니 민주노조라고 해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돼 버렸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도 어떻게 조합원의 권리를 삭감하는 일이 이뤄졌는지 쓰이고 있지 않다. 오늘도 조합원의 권리를 두고서 사용자와 교섭하는 일이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이 쓰여야 할 것이 쓰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상급단체의 요구와 투쟁만 전부로 쓰고 있을 뿐이다. 조합원의 권리가 되지 못하는 요구와 투쟁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오늘은 실종을 말할 지경이 되고 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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