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산드라가 자신의 복직을 위해서 직장 동료를 만나는 과정을 그린 로드무비다. 영화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 중요한 의제였던, 생산성 낮은 사람을 해고하거나 불평등한 임금으로 배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질문하는 사회 실험극처럼 보인다. 영화는 누구든지 처할 수 있는 상황설정과 선악이 모호한 인물들을 통해 관객에게 당신도 언제든지 이러한 상황에 처할 수 있고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우울증으로 휴직한 산드라는 복직을 앞둔 시점에서 16명의 회사 동료들이 투표를 통해 그의 복직 대신 각자 1천유로의 보너스를 받기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는다. 투표 결과는 14 대 2였지만 작업반장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산드라는 재투표 기회를 갖게 된다. 영화는 산드라가 주말 동안 직장 동료를 만나 재투표에 대해 대화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직장 동료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산드라의 복직을 지지하는 동료도 있지만 1천유로의 보너스가 필요한 동료도 있다. 재투표 결과는 8 대 8. 반수를 넘지 못해 산드라의 복직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사장은 산드라가 복직하고 동료들도 보너스를 받게 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단 조건은 조만간 계약이 만료될 동료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산드라는 망설임 없이 거절한다.
해고라는 중대한 결정은 애초 사장이 내리고 책임졌어야 하는 문제인데도 복직과 보너스로 포장해서 일말의 도덕적 책임마저 노동자들에게 돌려 버린다. 그래서 산드라와 동료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산드라와 동료들은 이 잔인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각자 나름의 이유로 결정하게 된다. 동료들은 재투표로 번복한 결정을 통해서 인간의 선의를 보여주고, 사장의 제안을 거절한 산드라의 결정은 연대이자 자기 존엄성에 대한 선언을 보여준다.
영화는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자는 나약하고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선택권이 별로 없어 보여도 우리에게 분명히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보편적인 정의가 나뿐만 아니라 노동자 모두에게 실현되길 바라는 연대에서 나온 용기를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투철한 신념과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는 영웅 대신 보통의 사람이 보여주는 연대의 용기가 마음에 와닿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세계는 연결돼 있고 영화 속 인물들처럼 선택과 책임의 상황을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의 유럽과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한 문제는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세대갈등으로도 보이고 노노갈등으로도 보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 임금차별을 둘러싼 공정성 시비, 불안정한 일자리를 둘러싼 많은 담론은 그 어떤 때보다 거대한 갈등의 진원지가 돼 가고 있다.
기회의 공정은 정의의 한 부분이고 정의의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입사 과정의 난도가 그 이후 일자리의 안정성과 임금수준을 계속적으로 결정할 필연적인 근거는 없다. 안정된 일자리는 극히 제한적이고 지급할 수 있는 인건비의 총액은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제로섬 게임에서 분배는 기회의 공정으로만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의심해 봐야 한다. 공정을 앞세워서 노노갈등을 부추기는 자본의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전략은 시험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불안정한 일자리나 저임금은 그들의 마땅한 몫이라고 정당화해서 노동자를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고립된 섬처럼 만들어 버린다. 마치 영화 속에서 사장이 감당해야 할 결정을 노동자들에게 떠밀어 산드라를 동료들과 분리하고 파편화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산드라의 동료들이 숙고를 통해 재선택을 하고, 해고 위기를 온몸으로 느껴 본 산드라가 다른 동료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용기 있는 결정을 하는 모습이 마음을 흔든다. ‘비’정규직의 접두사 하나가 신분으로 작용하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결국 내가 겪고 싶지 않은 부당한 일을 타인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역지사지의 마음에서 비롯한 연대가 아닐까 싶다. 노동하는 모든 이들이 존중받는 사회는 이러한 연대의식에서 시작한다. 누구든지 산드라가 될 수 있고 누구든지 산드라처럼 용기 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