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들에게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도 판사가 모르면 지는 것이 재판”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재판에서는 증거에 의해서만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설령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판사를 설득할 수 없으면 패소를 마주해야 한다.
그런데 하늘과 땅은 늘 수수방관하기 마련이므로, 증거들을 통해서도 사실을 명확하게 확정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래서 소송법에는 ‘입증책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데 사실이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았을 때 불이익을 입는 쪽이 “입증책임을 부담한다”고 표현하곤 한다. 쉽게 말해서 어떤 색깔이 흰색인지 검은색인지를 놓고 쌍방이 다투고 있을 때, 그런데 증거들을 통해서는 그 색깔이 애매한 회색인 것으로만 보일 때, 어느 쪽 편을 들어줄 것인지가 입증책임의 문제다. 흰색임을 주장하는 자가 입증책임을 부담한다고 하면 회색은 (그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검은색이 되는 것이고, 검은색임을 주장하는 자가 입증책임을 부담한다고 하면 회색은 (역시 그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흰색이 되는 것이다.
남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퇴직금을 받으려고 하거나, 휴가를 쓰려고 하거나, 직장내 괴롭힘에 대해 신고하려고 하면, 즉 근로기준법과 다른 노동법령의 적용을 받고자 하면, 자신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법이 그렇게 정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판례가 아무런 근거 없이 법을 그렇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 애석한 해석 때문에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노동자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첫째, 노동자의 노동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회사에서 보관하고 있어 자신의 노동과 직결되는 자료임에도 여기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퇴사 후 퇴직금을 받고자 하는데, 자신의 피와 땀과 노동이 스며든 자료들을 미처 챙겨서 나오지 못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노동청에 신고하거나 법원에 제소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근로자임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했으니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식이다. 자신에게 책임이 부과되는 데 쓰일 수 있는 자료를 온전히 보관하면서 곧이곧대로 제출하는 용자(혹은 사용자)가 얼마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하늘과 땅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이 수수방관한다.
둘째, 타인에게 종속적 노동을 수취하면서도 마치 그 타인들이 독립계약자인 것처럼 교묘하게 외관을 꾸미는 사업장이 있다. 이른바 ‘특수형태근로종사자’ 혹은 ‘플랫폼종사자’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서 이러한 사업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화려하고 현란한 외관 때문에 이들은 검은색의 영역에서 종속노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종종 회색지대에 있는 것으로 오인된다. 분쟁 과정에서 이들이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얼굴에 남은 검은색 혈흔을 입증하지 못하면, 설령 증거들을 통해 짙은 회색의 다크서클이 감지된다 하더라도, 결국엔 백옥피부로 평가된다. “근로자를 근로자라 부르지 못하고 사용자를 사용자라 부르지 못하는데, 재판청구를 허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노동과 관련한 대부분 증거가 사용자측에 편재돼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근로자임을 주장하는 자에게 입증책임을 부담하게 하는 판례 때문에 남 밑에서 종속적으로 일하는 사람인지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인지가 증거를 통해서 확정되지 않았을 때, 다시 말해 사용자가 회색 재를 뿌려 근로자의 입증을 방해하는 데 성공했을 때, 노동자는 노동법에서 배제된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노동법을 호출할 수 없다.
입증책임을 전환해야 한다. 즉 “근로자임을 주장하는 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사용자가 입증책임을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판례의 해석을 통해 바꿀 수 있는 부분이고, 여의치 않다면 법률 개정이라도 도모해야 한다. 타인의 종속적 노동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이익을 보는 자라면 마땅히 사용자로서 법적 책임을 부담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책임이 마뜩잖다면 법적 분쟁에서 그 타인이 정말로 자율적으로 일하는 독립계약자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도록 대비해 놓으면 될 일이다(이를 통해 ‘그 타인’은 정말로 자율적으로 일하게 될 테다). 지금과 같이 근로자임을 주장하는 자에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점에 대한 입증책임을 부담하게 하면, 타인의 종속적 노동을 수취하면서도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얌체들을 솎아 낼 수 없다.
노동자는, 누가 뭐래도 ‘노동자’다. 더 이상 입증책임으로 노동자들을 울리지 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