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수신료는 월 2만원이 넘는다. 수신료가 40년간 월 2천500원에 묶인 KBS 입장에선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뾰족한 해법도 없다. ‘원칙’ 없는 여야는 정권에 따라 ‘올리자’ ‘내리자’ 입장이 표변한다. 심지어 현 집권 더불어민주당은 여당인데도 수신료 인상에 호의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국민들이 KBS가 공영방송 만드느라 고생했으니 수신료 올려 주자고 할 리도 없다.
정권 눈치 보지 말고 국민만 바라보고 보도하고, 공익성 높은 프로그램 많이 만들었다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거다. KBS는 80년대 거셌던 ‘시청료 거부 운동’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했다.
답답했던 KBS 사장이 최근 “숙의민주주의로 수신료 인상을 설득하겠다”고 했지만, 설득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KBS 사장은 “제2의 나훈아쇼나 대하드라마, 명품 다큐멘터리 등을 준비한다”고 했다. 나훈아쇼가 공익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환경스페셜>을 부활시킨 건 높이 살만하다. BBC가 시사와 자연 다큐의 선도자인데 반해 KBS는 아직도 멀었다. 그동안 자연 다큐는 무리한 욕심으로 가끔 사고를 쳤지만, KBS에 비해 구멍가게에 불과한 EBS가 더 나았다.
EBS <세계테마기행>과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형식만 약간 다를 뿐 비슷하다. KBS가 명실상부한 공영방송이 되려면 여행 프로 하나라도 다른 방송사가 도저히 흉내 못 낼 형식과 내용으로 승부해야 한다. 해당 지역과 인연 있는 여행자 한 명 섭외해 스태프 몇 명 따라붙어 적당히 둘러보는 지금의 여행 프로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전 군사정권에서나 볼 법한 포맷이다.
KBS는 최근 수신료 인상을 요구하며 공영성을 높인다며 7년 만에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을 내놨다. 벌써 경북 문경시와 업무협약까지 체결했단다. 또 이방원이냐, 기가 막힌다.
사극 주제로 여말선초와 세조, 임진왜란, 숙종, 영·정조, 고종은 이제 그만 해도 된다. 특히 여말선초와 임진왜란은 수십 번 울궈 먹었다. 외국 사람들 눈엔 한국의 왕조 시대엔 이순신과 이방원밖에 없는 줄 알겠다.
KBS 사장은 이방원을 내놓으며 “퓨전 사극이나 역사 다큐멘터리도 있지만 이들이 채울 수 없는 ‘정통 역사물’이라는 영역이 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듯 우리 민족 정체성을 깨닫고, 국민적 사기를 고취하는 것도 공영방송의 역할”이라고 했다. 십분 동의한다. 그런데 왜 하필 이방원이냐.
가깝게는 2015년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배우 유아인이 이방원 역할을 맡았다. 2015년 JTBC <하녀들>에선 배우 안내상이, 2014년엔 KBS <정도전>에선 안재모가, 2012년 SBS <대풍수>에도 최태준이 이방원으로 잠시 나왔다. 2011년 SBS <뿌리깊은나무>에선 백윤식이, 2008년엔 KBS <대왕세종>에선 김영철이, 1996년 KBS <용의 눈물>에선 유동근이, 1983년 MBC <조선왕조 5백년>에선 배우 이정길이 이방원으로 나왔다. 빠진 것도 수없이 많다. 또 태종 이방원이냐, 지겹다.
왜 KBS는 녹두장군 전봉준이나 홍경래, 진주 민란, 암태도 소작 쟁의 같은 사극은 못 만드나. 나라를 바꾼 이성계는 그렇게 자주 KBS에 등장하면서, 실패한 민중 봉기는 사극 소재로 삼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전봉준은 SBS가 2019년 <녹두꽃>으로 방영했지만, 퓨전에 가까웠고 대본도 허술해 시청률이 한자리에 그쳤다. 전봉준은 여전히 소환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번에 <태종 이방원>도 문경에서 촬영한단다. 이방원이 문경과 무슨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곳곳에 흉물로 버려진 사극 촬영장을 재탕하지 않으려면, 황산벌 인근에 촬영장 만들어 ‘전봉준’을 찍고, 이후 전북도나 정부가 명분을 갖고 보존하면 된다. 작고하신 역사학자 김의환 교수가 1970년대 전라·충청을 돌며 채록한 <전봉준 전기>(정음사, 1981)가 훌륭한 텍스트가 될 것이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