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상이 뉴노멀(New Normal)인지, 넥스트노멀(Next Normal)인지는 관심이 없다. 그 세상이 무엇이든, 뭐라 부르든 엄청나게 다른 세상일 것일 거라고 믿지 않는 나는 무슨 노멀 논의에 무심하다. 지난 4일 오후 전북대 로스쿨 회의실에서 딴 세상에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아래서 열린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정기학술대회에 노동부문 토론자로 참석했다. ‘팬데믹 이후의 뉴노멀과 민주법학’이라는 제목으로, 기조발제에 이어서 인공지능(AI), 생태·기후위기, 노동구조변화, 저출산·고령화 등 네 가지 주제별 발제가 진행됐다. 뉴노멀 시대에 ‘인공지능에 대한 법인격 부여 논의’는 낯설고, 생태·기후위기 부문에서 ‘인류세에서 지구공동체를 위한 법체계 모색’도 낯설기만 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에 인격을 부여한다는 것이, 사물과 공동체를 모색한다는 것이 내가 사유해 왔던 주제도 방식도 아니라서 그 논의는 멀기만 했다. 단지 팬데믹 공포가 법학자의 머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내가 토론해야 할 것이 노동부문 발제여서 다행이었다. 발제자 권영숙 박사는 뉴노멀이니 넥스트노멀이니 개념을 둘러싸고 제법 심각하긴 했지만, 팬데믹 아래서 노동의 현실과 전환을 말하고 있었다. 이 나라 노동자의 현실에 발을 딛고서 사유하고 있었다. 사실 토론자로서 나는 할 말이 많았다. 중간에 사회자가 짧게 해 달라고 토를 달지 않았으면 할 말을 다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해야 할 말을 산더미로 쌓아 놓고서 장황하게 토론을 시작했던 것인데, 용두사미가 되고 만 것이 아까웠다.
2. 비록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내가 했던 말은 이랬다.
발제자가 코로나 ‘K-방역의 사회적 그림자’라는 소제목으로 K-방역이 노동동원과 통제에 기초한 노동집약적 방식과 노동안전을 도외시한 사기업의 이윤추구가 결합됐다고 평가하면서, 구체적으로 노동권 없는 노동자들, 제도 밖 시민들, 시민 아닌 사람들, 고용보험에서 제외된 노동자들, 근로기준법 적용제외 대상, 보호받는 노동 대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 등 한국 노동체제와 복지체제의 성격이 코로나19로 드러났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분명히 코로나19 사태로 이 나라에서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이 심화됐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것이 이 나라에서 노동체제를 온전히 말한 것이라고 나는 보지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 아래서 드러난,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이 나라에서 전반적인 노동현실을 말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렇게 노동의 이중성에만 관심을 두고서 논의하게 되면 노동법 적용을 받아 보호받는 노동자 일반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만다. 그러면 계급으로서 노동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노동 내부의 문제만 드러나게 되며, 이제 문제는 노동 내부의 격차 해소로 접근하게 된다. ‘노동의 이중성’ 논의가 심화될수록 자본에 대한 노동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노동 일반의 문제가 가려지지 않도록 논의해야 한다. 노동법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자들, 노동권 없는 자들의 문제는 노동법 적용범위 확대에 관한 논의로 전개되는데, 이런 논의는 더불어민주당은 물론이고 국민의힘 등 보수의 당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 공약으로 내걸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민주와 보수로 집권당을 달리했지만 노동에 대한 공세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노동의 이중성을 강조하며 노동법 보호를 받는 노동권 있는 노동자의 권리를 삭감하고자 시도했다. 그래서 지난 20여년 이 나라 노동운동사는 이러한 공세에 맞선 노동자투쟁의 역사였다. 바로 이런 노동자투쟁을 기억하기에 나는 위와 같은 발제 부분에 심각해진 것이겠다.
3. 한편 발제문에서 발제자는 한국 사회 “체제 전환은 이미 이뤄졌다”며 “87년 민주화라는 정치적 전환과 97년 신자유주의 경제전환”을 말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 나는 밑줄을 긋고 물음표를 붙였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는 안타깝게도 나는 할 말을 다하지 못했다. 아마도 발제자는 여기서 체제전환론자들이 말하는 체제 전환은 이미 이뤄졌다고, 코로나19 이후에 새로운 전환을 논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겠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노동자의 자유로 토론하고 싶었다.
먼저 그것은 노동 배제의 민주화였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성취로 거둔 87년 체제 아래서 노동자의 자유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당신이 87년 체제를 두고서 민주화를 말할지 몰라도, 노동자의 자유로 보자면 87년 이전과 이후가 질적으로 달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1987년 헌법전에는 노동자가 단결해서 교섭과 행동할 자유가 보장되노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등 구체적인 입법과 집행에서는 보장되지 않았다. 노조설립과 가입을 국가법으로 규제하고서 교섭하고 파업 등 행동하는 것을 주체, 목적, 절차, 수단과 방법 등 수많은 법조문을 통해 제한하고 금지한다. 그래서 단순히 노동자들끼리 노조로 단결하는 것조차 법적 규제를 받고 있다. 그저 단순히 평화적으로 노무 제공을 거부하는 파업조차도 주체·목적·절차 등 갖가지 규제를 거쳐야만 노동자는 민·형사 책임을 면한다. 1987년 이후 노조법 제·개정이 있었지만, 이렇게 노동자의 자유에 대한 규제는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 규제는 노조법을 제·개정할 때마다 추가돼 왔다. 그러니 아무리 당신이 87년 체제를 민주화라 부른다 할지라도, 거기서 노동자의 자유는 없다. 노동자의 자유 없는 민주화, 이것이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였다고 말해야 한다.
발제문에서 “97년 신자유주의 경제 전환”이 있었다고 밝혔다. 1997년 이전과 이후의 한국 경제는 질적으로 달라진 것인가. 1997년은 IMF 관리체제에 돌입했던 시기였다. 이전과 이후에 이 나라 경제는 달라진 것 같긴 한데, 전환을 말할 정도로 어떻게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재벌체제가 해체된 것도 아니고, 국가권력의 경제에 대한 관여 정도가 급격히 낮아졌다고 볼 수도 없다. IMF 관리체제 아래서, 그리고 이후에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정리해고가 근로기준법에 규정됐고,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등 비정규직법이 제정됐다. IMF가 특별히 주문했던 것이라고 했다. 고용 등에 관한 노동자권리를 약화시켰던 것인데, 이는 오늘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내 토론의 결론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로 볼 때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으로 나아갔다.
4. 그런데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 대한 내 생각이 무엇인지 갑자기 궁금했다. 발제에 제한받지 않고서 자유롭게 생각해 봤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가 다른 세상일까. 코로나 팬데믹 세상은 노동자의 자유를 억압하고 고용 등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시키고자 한 이전 세상의 계속이었다. 팬데믹으로, 노동자 권리 삭감 등으로 사용자 자본의 부담이 전가돼 노동자들은 고통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것은 기존 세상의 질서에 따른 것이었다. 새로운 팬데믹의 질서가 만들어져 노동자에 대한 전가로 나타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팬데믹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었다. 이렇게 팬데믹 위기에서도 이 세상은 노동자에 고통을 전가할 만큼 강력했다. 그리고 이는 노동존중 사회의 실현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에서 순조롭게 전개됐다.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임금 등 노동조건이 약화됐어도 노동의 격렬한 저항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노동을 위한다는 정부의 조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IMF 관리체제 아래서 이 나라 노동운동이 전개했던 투쟁에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정도에 머물렀다. 박근혜 정권 심판을 위한 촛불혁명에 함께한 탓일까. 촛불대선으로 공동정권을 구성한 것도 아닌데 이 팬데믹 세상에서 몹시 조심스럽게 보였다. 그러니 택배노동자 등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만 들렸다. 노동존중 사회 실현을 말하는 문재인 정부도 공감하는 목소리만 들렸다. 그러니 오늘은 노동권 없는 노동자들, 제도 밖 시민들, 시민 아닌 사람들, 고용보험에서 제외된 노동자들, 근로기준법 적용제외 대상의 문제를 일반화해서 보호받는 노동 대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 등으로 한국 노동체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겠다.
이 팬데믹 세상을 두고서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오늘 이 나라에서는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 일반을 두고서 노동운동은 전개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이 한 나라의 노동운동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걸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발제 취지를 알면서도 발제문의 일부분을 끄집어내 나는 이렇게 못다 한 토론을 늘어놓는 것이겠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오늘과 달리,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하는 것이 노멀인 세상이길 바라기에.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