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미국서 큰일이 생기면 영국 언론인 가디언과 BBC 독자(시청자)가 늘어난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도 그랬다. 트럼프에게 좌파 매체라고 맹비난당했던 CNN은 당시 전쟁을 생중계했다. 마치 온라인 게임 하듯.

그래서 나는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CNN 기자를 향해 당신은 빨갱이라고 몰아붙일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 CNN은 별 고민 없이 온종일 뉴스를 쏟아내는 뉴스 기계에 불과하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이 얼마나 오른쪽으로 갔으면 CNN을 보고 좌파 언론이라는데 언론학자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2003년 봄 이라크 전쟁이 터지지 직전 나는 유럽에 있었다. 전쟁의 상처를 가장 많이 앓은 독일 베를린 시내엔 연일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밧줄을 걸고 공중에 매달린 시위자들을 응원하려고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공중에 매달린 한 청년은 자신의 발에 긴 현수막을 늘어뜨렸다. 거기엔 “늙은 유럽이 말한다. NO WAR!”라고 적혀 있었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으로 보유한 생화학무기를 없애려고 이라크를 침공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거짓말에 유럽 사회는 단호하게 “전쟁은 안 된다”고 맞섰다. 그러자 얼간이 부시 대통령과 늙은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미국에 사사건건 제동 거는 프랑스와 독일을 향해 “늙은 유럽(old Europe)”이라 비난했다. 이후 유럽 반전 시위에선 구호를 외칠 때마다 “늙은 유럽이 말한다”를 선창한 뒤 하고 싶은 말을 했다.

2003년 전쟁 직전 영국 BBC를 방문했는데 당시 BBC 편성부국장은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온라인 뉴스보기 트래픽이 크게 뛰었다고 했다. 온라인 접속자 위치를 추적해 보니 대서양 건너 미국 쪽에서 유입이 엄청 늘었다고 했다.

불안해진 미국인들이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미국 방송 대신 BBC와 가디언 등 영국 언론에서 정보를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쇼’에 지나지 않는 미국식 ‘뉴스쇼’는 오락물이지, 뉴스는 아니었다. 신변잡기나 늘어놓는 정도라면 봐줄 만 하지만 ‘미국의 이익’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전쟁을 부추기며 거짓말을 늘어놓는 미국 언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언론이 말하던 ‘미국의 이익’은 ‘미국인의 이익’이 아닌 ‘미국 군수업자들의 이익’이었다. 대통령과 부통령 모두 군수업과 줄이 닿아 있었으니.

영국 정부는 당시 독일과 프랑스처럼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다. 유럽 정치지도자 가운데 참전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블레어 영국 총리는 “부시의 푸들 강아지”라는 놀림을 받았다.

영국 정부가 전쟁 쪽으로 기울었어도 BBC는 줄곧 부시가 말하는 생화학무기에 의문을 품고 집요하게 취재했다. BBC는 2003년 8월 블레어 총리가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있지도 않는 이라크 생화학무기 보유설을 조작한 걸을 알고도 참전했다고 밝혔다. 결국 블레어는 BBC 보도로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다. BBC가 왜 공영방송의 대표주자로 불리는지 잘 드러난다.

그랬던 BBC가 요즘 추락하고 있다. BBC 마틴 바시르 기자가 1995년 다이애나를 인터뷰하려고 “왕실 직원이 돈을 받고 다이애나의 개인정보를 흘렸다”며 돈이 오간 은행 내역서를 보여줬다. 이때 기자는 자기가 위조한 내역서를 보여주며 사기를 쳤다. 1996년에도 관련 의혹이 제기돼 BBC가 자체 조사했지만 문제없다고 했는데 엉터리 셀프 조사였다.

26년 전의 일이라도 후폭풍은 거세다. BBC의 유일한 재원인 수신료 동결과 개혁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다. BBC 기준으로 보면 한국엔 살아남을 언론사가 몇이나 될까.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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