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희원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강의 경관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곳에, 대한민국의 대표 부촌 아파트단지가 있다. 지은 지 45년도 더 됐는데 그 명성은 여전하다. 외관은 낡고, 주차공간은 턱없이 부족해 출퇴근 시간이면 주차 전쟁이 벌어지지만, 서울시장이 바뀐 이후 재건축 기대가 높아져 ‘부르는 게 값’이라고들 한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손이 되고 발이 돼 주는 경비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한 평 남짓한 초소 안에 머물다가, 입주민이 부르면 언제든지 나가 업무를 수행한다. 택배도 맡아 주고, 분리수거도 도와준다. 입주민이 창문을 두드리면 초소에 보관돼 있던 자동차 열쇠를 들고나와 주차장에 빼곡히 주차된 차량을 이동시킨다. 마치 테트리스를 하듯 정해진 규칙에 따라 차들을 움직여 길을 낸다. 초소에 앉아 도시락으로 식사를 때우다가도, 이른 새벽 초소 의자에 기대어 졸다가도 입주민이 부르면 곧바로 나가 ‘발레파킹’을 해야 한다. 주차장이 비좁아 불편할 것 같다며 거래를 망설이는 이들에게 공인중개사는 이렇게 말한다.

“주차는 (경비)아저씨가 다 알아서 해 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노동자 30여명은 2018년, 휴게시간 동안 근로했음을 전제로 한 임금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서울중앙지법 2019. 9. 19. 선고 2018가합512488 판결)은 경비노동자들이 휴게시간에 사용자인 입주자대표회의의 구체적인 업무상 지휘·감독하에 어떠한 업무를 했는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의 각종 수당 청구를 기각했다. 야간에 주차대행 업무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빈도가 높지는 않으므로 휴게시간 내내 근로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법원의 판단은 이와 달랐다(서울고등법원 2021. 3. 26. 선고 2019나2044676 판결). 원고들에게 매 휴게시간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업무를 얼마나 자주 수행했는지를 일일이 증명할 것을 요구하는 대신, 원고들이 수행한 업무의 특수성을 중점적으로 고려했다. 이 사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경비노동자들의 휴게시간 총량(6시간)만을 정해 놓았을 뿐 휴게시간이 구체적으로 몇 시부터 몇 시까지인지 입주민들에게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입주민들은 24시간 중 언제라도 원고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이들에게 업무수행을 요구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원고들은 별도의 휴게공간을 제공받지 못한 채 1평 남짓의 초소에서 대기하며, 시각을 불문하고 발생하는 입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항소심 법원은 이처럼 간헐적·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입주민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고들의 업무 환경에 더욱 집중했다. 사방에 나 있는 창문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초소 안에서 대기하며, 입주민들이 창문을 두드리며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이에 응해야 했던 원고들의 근무 실태와 일부 원고들이 초소에서 근무하며 작성한 경비일지 기록 등을 볼 때 이들에게 휴게시간이 제대로 보장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대리를 하며 원고들이 수행한 주차대행 업무가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설명하는 데에도 많은 품을 들였다. 이 사건 아파트 주차장이 극도로 협소해 체계적으로 주차대행 업무를 수행해 온 원고들 없이는 단지 내 차량통행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음을 주장·입증했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직접 나서서 원고들의 주차대행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중재했던 사실들을 토대로 해당 업무 역시 사용자의 구체적인 지휘·감독하에 이뤄진 것임을 밝혔다. 다행히 항소심 법원은 이러한 원고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줬다.

소송이 진행되는 3년여 동안 두 명의 원고가 세상을 떠났다. 그중 한 명은 이 사건 아파트에서 일하던 중 과로로 사망했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24시간 2교대 근무제를 반복한 결과 생긴 참사였다. 판결 결과를 채 받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저임금이 인상됐다는 이유로 경비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용역으로 전환하기도 했던 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얼마 전 상고장을 접수했다. 24시간 중 언제라도 필요할 때면 너무나 당연하게 요구됐던, 이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는 날이 너무 늦게 오지는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이들의 수고에 기대 ‘명품’ 아파트의 호가는 평당 1억원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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