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눈앞의 일에 분노한다. 김수영 시인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질문하며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고 한탄한다. 시인은 잘못된 사회 구조에 대해 분노는 하지만, 그 구조를 바꾸기에 매우 나약한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만만한 자들을 향한 분개로 이어지는가를 들여다본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이 진행되면서, 그에 대해 분개하는 정규직들의 목소리가 종종 들린다. ‘채용의 공정성’을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지만, 공정과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보다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 고생한 내 노력이 폄훼되는 것에 대한 분개가 내재해 있는 것 같다.
‘능력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시험의 공정성이란 허상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별로 설득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야말로 ‘정서’가 가로놓여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노동자들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아등바등 살다 보니, 나와는 다른 이들의 모습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지고, 내가 너무 힘들고 지치니까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다른 노동자들을 돌아볼 틈이 없어졌다. ‘힘들다’는 것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피로만이 아니다. 경쟁 사회에서 버텨 내야 하는 정신적 피로감과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얹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힘든 상태는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를 포위하고 있는 암울한 정서일 뿐이다.
약자에 대한 이런 불만은 분풀이는 될지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것이 우리 일터를 더 좋은 일터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갈라져 있고 위계와 차별이 난무하는 일터가 정말로 좋은 일터가 될 수 있겠는가. 노동자들이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정규직들이 이렇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지금의 경쟁 구조가 너무 크고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구조는 내 힘 바깥에 있다. 그러니 “구조가 문제”라거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말은 허망하고 의미 없는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니 내가 화를 내도 괜찮은 대상, 내가 분개해 나서면 상대를 움찔하게 만들거나 위축시킬 수 있는 일에만 분노하는 수밖에.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노동자 개인은 매우 무기력해진다. ‘능력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이 말은 능력이 있는 노동자가 예전보다 더 존중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노동자 개인이 평가의 대상이 되고, 능력에 따라 세분화되고 위계화된다는 의미이다. 이 속에서 노동자 개인의 권리나 인격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능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노동자 개인을 평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이들은 그 평가의 기준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설명할 필요 없이 때로는 시험으로, 때로는 얼마나 말을 잘 듣는가 여부로, 때로는 실적으로 노동자들을 줄 세운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자 개인은 아무리 능력을 키운들 구조 전체에 대항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의미 있는 노동조합의 활동이 필요하다. 노동자 개인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집단적 힘으로 이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 노조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조’ 중에는 ‘소속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협소하게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분개하는 노동자들도 대부분 조합원이다. 노조가 경쟁과 위계 중심의 일터와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조합원의 목소리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정규직화 반대에 나선다면, 그 노조는 아파트 매매가를 올리기 위해 담합하는 주민모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조도 다 같은 노조가 아니며, 어떤 지향과 원칙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노조의 성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미세한 고통과 어려움에 천착해야 하지만, 그것이 소속 조합원의 이해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 사회의 노조는 노동자들을 경쟁시켜서 권리를 훼손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더 크게 뭉치고 더 크게 연대하는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더 큰 연대’의 원칙이 사라지면 그 노조는 노동자들의 무기력함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을 부추기는 기업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다.
‘연대의 원칙’을 갖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노조가 더 많아지기를 꿈꾼다. 나에게 당장 불이익을 가져오는 조그만 일에 분개하기보다, 노동자의 삶을 경쟁과 위계로 몰아넣는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꿈을 꾸는 조합원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