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가람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사람들)

지난 15일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은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 매뉴얼’을 발간했다. 전체적인 내용의 윤곽은 2019년 2월21일 노동부가 발간한 ‘직장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과 유사하다. 그러나 직장내 괴롭힘 관련법 시행 후 발간된 것이라 지난 매뉴얼에 비해 실무적으로 내용이 풍성해진 면도 있고, 발간기관의 성격에 맞춰 노동안전으로서의 접근이 강조된 면도 있다.

특히 반가웠던 것은 기존 노동부 매뉴얼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성적 괴롭힘에 대한 내용을 보완한 부분이다. 노동부 매뉴얼에서도 젠더 괴롭힘이 직장내 괴롭힘에 속한다 정도의 기술은 있다. 그러나 젠더 괴롭힘의 정의가 매뉴얼에 전혀 담기지 않아서 사실상 실무에선 저마다의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안전보건공단의 매뉴얼은 “여성비하 행동, 고정 관념적 성역할 강요, 성 정체성 등에 근거한 성적 괴롭힘”이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설명을 짧게나마 덧붙여 현장의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직장내 괴롭힘의 판단기준에 대한 설명 중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이 표현은 지난 매뉴얼에서도 동일하게 쓰였던 것인데, 문제 행위가 “업무관련성이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업무관련성’이라는 표현은 직장내 괴롭힘 관련법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2년의 간격을 두고 발행된 두 매뉴얼 모두 이러한 표현을 요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법문에도 없는 업무관련성은 왜 등장했을까.

사실 업무관련성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의 직장내 성희롱 정의규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입법화된 직장내 성희롱은 수많은 사례의 축적과 공론화를 거치면서 사회 전반의 이해가 상당히 높아졌고, 비교적 안정적인 수준의 사회적 합의도 이뤄졌다. 반면에 2019년에서야 입법화된 직장내 괴롭힘은 아직 사회적 합의 수준을 논하기엔 그 기초가 되는 학술적 연구도 부족하고, 실무적으로도 이제 막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 있다. 그러다 보니 원론적으로는 직장내 괴롭힘이 직장내 성희롱의 상위 개념임에도 20년 넘는 후발주자인 직장내 괴롭힘이 직장내 성희롱의 노하우를 빌려 오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업무관련성이 마치 제자리인 양 꿰차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는 업무관련성이 들어올 자리가 아니다.

직장내 괴롭힘은 업무상 적정범위를 벗어나지 말도록 정하고 있고, 직장내 성희롱은 업무에 관련돼 이뤄질 것을 요건으로 한다. 이러한 차이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직장내 성희롱의 판단에서 ‘업무관련성’ 입증은 계속해서 비판대상이었다.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어렵게 입증하더라도, 그러한 피해가 업무와 관련한 상황에서 이뤄졌음을 추가로 입증하지 않으면 성희롱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업무시간에 사무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다행이지만, 업무 외적인 시간에 외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 시간에 왜 그곳에 가해자와 함께 있었냐”는 가혹한 질문에 답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무리 입증책임이 주장하는 자에게 있다지만, 사실 입증과 업무관련성 입증을 모두 피해자가 부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처럼 과도한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업주가 성희롱 분쟁에 있어 입증책임을 부담하도록 하는 등의 입증책임 전환 시도가 있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피해자의 입증 부담이 큰 것이 현실이다.

또한 ‘업무와 무관한’ 괴롭힘 규제도 필요하다. 직장내 관계에서 업무와 무관하다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직장내 괴롭힘은 좁은 의미의 업무관련성으로 포섭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점심식사 장소를 피해자에게만 알려주지 않는다거나, 일상적으로 유령 취급을 하는 따돌림 행위의 경우 직접적으로 업무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명백한 직장내 괴롭힘이다. 그러한 행위가 업무와 관련된 것이 맞냐는 질문을 피해자에게 한다면 피해자는 이를 어떻게 입증해야 할까. 가해자 집단은 은연중에 피해자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다. 업무와 무관한 일로 둘러댈 핑계는 무수히 많고, 가해자가 다수라면 이는 훨씬 수월하다. 업무관련성이 인정되지 않아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피해자가 당한 따돌림은 업무와 무관한 ‘개인적인 일’이 돼 버린다. 피해자는 그저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후 피해자의 직장생활은 어떻게 될까. 나아가 이런 사례가 축적되면 직장내 괴롭힘 피해자들은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진 않겠다.

성희롱 관련법이 만들어지고 20년이 지날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푸념에도 많은 게 변해왔다. 법학자뿐만 아니라 인권활동가들, 피해자들, 그들의 곁에 선 이들까지 더 나은 법 개선을 위해 목소리 내왔다. 그렇게 쌓인 20여년의 사회적 경험치로 만들어 낸 게 직장내 괴롭힘 관련법이다. 벼락치기로 만들어진 듯 보여도,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조금이라도 더 실효적인 법안을 만들려고 많은 이들이 머리를 맞댔다. 그런 세심한 고민 끝에 현행법이 업무관련성이 아닌, 행위의 ‘적정성’을 요구하게 됐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입증하고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선다고 주장하면, 이후엔 가해자가 이를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가 업무상 적정범위 내에 있음을 입증하도록 만든 것이다. 법은 ‘다 계획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피해자에게 달려 있던 무거운 추 하나를 간신히 덜어 냈는데, 어째 여전히 피해자의 저울이 무겁게 기운다. 직장내 괴롭힘 관련법의 안착화를 위한 집행기관의 노고가 본의 아니게 단어 하나, 어휘 하나까지도 고심하며 만든 입법기관의 수고를 무로 돌려 버렸다. 법전에 문장 하나 새겨 넣는 건 입법자들의 역할이지만, 법의 취지가 국민들의 삶에 새겨지도록 하는 것은 집행기관의 역할이다. 너무 늦지 않게 바로 잡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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