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명호 변호사(법무법인 오월)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형사사건에 휘말릴 때가 있다. 노조가입을 권유하기 위해 회사 인트라넷에 있는 직원 명단을 이용해 문자를 돌렸을 뿐인데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이란다. 대표이사가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노조를 탄압하기에 이를 규탄하는 피켓 시위를 했는데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카카오톡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비방 글을 올리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처벌이 가중된다. ‘이 정도로 별일이야 있겠어?’ 했다가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관 앞에 서는 별일을 당한다.

제아무리 투사라도 수사기관은 무섭다. 전화벨이 울리고 경찰이라고 하면 차라리 보이스피싱 전화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나를 비켜 간다. 당장 이번 주에 경찰서로 조사받으러 오라고 한다. 누가 무슨 일로 고소했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갈 수는 없다. 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오라는 건 내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니 말 그대로 임의수사다. 법원의 영장 없이는 누구도 잡아갈 수 없다. 일단 혐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접수번호도 확인하자. 조사 일정도 여유 있게 조율하자. 상대를 알아야 방어도 가능한 법. 경찰서 민원실에 가서 정보공개청구서를 작성해서 고소장도 확보하자.

누가 무슨 일로 고소했고 어떤 혐의로 조사받게 된 건지 확인했다. 이제 수사관의 신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 하나만 기억하자. 수사관은 내 편이 아니다. 아무리 친절해도 범죄를 찾아내고 유죄의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수사관의 일이다. 어느 인자한 인상의 노련한 수사관이 자기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피의자를 안심시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수사관은 별일 아니니 금방 끝난다고 다독였고 피의자는 5시간 동안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형사사건에서 사실 인정은 증거에 따라야 하고 그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다. 판사는 오직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로 범죄가 증명됐을 때만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 그러니 피의자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려고 너무 애쓰지 않는 편이 낫다. 불필요하고 불명확한 말을 늘어놓기보다는 잘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다.

피의자신문은 인정신문으로 시작한다. 당신이 고소당한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다. 통상 이름과 주소지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신분증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철학적인 고민에 빠진 경우가 아니라면 내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수사관은 궁금하다. 대학을 졸업했는지, 결혼은 했는지, 자녀가 있는지,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살아 계신지, 주거는 자가인지 전세인지…. 이쯤 되면 여기가 경찰서인지 친척 어르신 댁인지 헷갈릴 정도다. 한 번은 피의자의 사정을 고려해서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조사입회에 참여했는데, 수사관의 인정신문에서 피의자의 월수입과 승용차 모델이 밝혀지면서 서로 민망했던 적이 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간단한 사건이라도 한번 조사가 시작되면 한 두 시간은 예사로 흘러간다. 장시간 조사를 받다 보면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빨리 마치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아직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피의자신문조서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일이다. 수사관은 신문을 마치고 내가 진술한 내용이 담긴 조서를 출력해서 보여준다. 나는 분명 “회사의 징계가 무서워서 제대로 진술하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조서에는 “회사의 징계를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기재돼 있다. “회사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는데, 조서에는 “회사의 부당한 조치에 대항해서 실제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적혀 있다.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다른 표현이다. 피의자신문조서는 내 진술이 수사관의 머리를 거쳐 작성된 것이므로 표현이나 뉘앙스가 의도와 달리 기재되는 경우가 많다. 법원에 중요한 증거로 제출되는 자료이므로 꼼꼼히 읽고 반드시 정정해야 한다.

최근 언론보도에서 현직 검사들이 수사망을 피하는 방법으로 ‘일도 이부 삼빽’이라는 은어가 있다고 들었다. 일단 도망가고, 이단 부인하고, 삼단 빽이라도 쓰라는 말이란다. 당당한 우리 노동자들의 윤리의식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 그 대신 일단 쫄지 말고, 이단 확인하자. 삼단으로 여기 노동변호사들이 여러분의 든든한 빽이 되겠다. 참고로 민변 변호사들이 쓴 “쫄지마 형사절차”라는 읽기 쉬운 가이드북이 발간돼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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